불청객, 봄의 반란
2019-05-03 (금)
고명선/ 수필가
봄 길에서 감기가 태클을 걸어 크게 엎어졌다. 여린 꽃잎으로 흔들린 몸이 잔바람에 티끌처럼 위태롭다. 붉게 달아오른 입안의 미각은 혼돈하고 긴장한 세포들은 시위하며 풀잎처럼 드러눕는다. 누워있어도 불꽃처럼 일어서는 마디마디, 콩 타작 도리깨질에 마른 막대기 되어 부서진다. 육신의 수레 끌던 몸뚱이는 야광시계 울음마저 지친 불면의 밤과 대치하고, 까맣게 타 들어가는 침묵의 자리에는 이불 대신 겹겹이 쌓여가는 서러움이 밀려온다.
세상엔 혼자만이 감당해야 하는 아득한 시간이 때로 존재한다. 예고 없이 찾아 온 불청객 감기는 몸이 부서지도록 휘청거리게 한다. 약한 곳을 집중 공략하는 싸움의 고수가 따로 없다. 저항할 수 있는 무기를 정비하지 못한 채 두들겨 맞으며 때 늦은 후회를 한다.
비타민은 알이 커서 목 넘김이 힘들다고 밀쳐놓고, 칼슘은 소화가 안 된다고 방치하다 유효날짜를 넘겼다. 몸에 좋다고 하는 여러 종류의 보조 약품에는 병마다 약 이름대신 복용하지 못할 핑계가 붙여졌다. 자신만만하게 믿었던 치아마저 세월의 부름 받고 배신하여 제철에 꼭 먹어야 하는 과일도 점점 멀리하게 되었다.
무엇에 쫓겨 끼니때도 놓치고 대충 허기를 채우며 위안을 삼았을 까. 평소에 홀대 당하던 몸이 한꺼번에 밀린 채무를 탕감하라고 으름장을 놓는다. 어리석음이 스스로 부끄러운 순간과 마주한다. 벼랑에 핀 잡초처럼 침대 끝에 매달려 몇 번이고 수척해진 두 손을 모은다. 전투하듯 씨름하던 축축한 침상 털고 일어난 자리에는 더부살이 하루가 어김없이 기다리고 서 있다. 단 한번으로 이곳저곳 구렁을 남긴 뒤에야 슬며시 사라지는 불청객을 힘겹게 밀치고 문을 나선다. 햇살이 어지러워 가려던 길을 포기하고 풀썩 주저 앉는다. 흔들리는 초점에 모아지는 작은 몸짓에 마음을 뺏긴다. 꽃이 아니어도 아름다운 들풀의 초연한 자태. 한 조각 삶의 의지로 바람과 맞서 당당하게 버티는 강인함이 부럽다. 겨우내 차가운 얼음을 이고 무던히 견디어낸 대견함에 쭈그려 앉은 내 모습이 한없이 작아진다. 밤낮없이 거친 기침소리에 놀라 바닥에 누워 말없는 목련의 봄에게 미안하다. 모든 고통의 시간은 헛되지 않으며 새로운 삶의 디딤돌이 된다. 실수한 일에는 반성을 하고 모자란 부분은 채워가는 지혜를 터득하며 앞으로 한발 더 전진하는 자세와 결심도 하게 된다.
예고 없이 들어 닥친 봄 감기와 맞서 부실한 몸을 힘겹게 달래고 보니 앞으로의 계획은 저절로 세워진다. “나이는 어쩔 수 없어” 와 “나이는 숫자에 불과해” 라는 두 나이의 선택이 앞으로 남은 시간을 이끌어 갈 것이다. 하나는 포기와 부정의 의미가 강하고 또 하나는 에너지가 함축된 긍정의 힘이 담겨있다.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은 건강에 대해 관심은 크지만 그만큼 노력하는 일이 쉽지가 않은 현실이다. 몸을 다스리기보다는 몸이 가고 싶어 하는 편한 길을 선택하기 때문이다. 늘어나는 나이에 무심코 끌려가지 못하게 육체의 힘을 키우고 더불어 소유로는 절대 누릴 수 없는 영혼의 목마름도 살뜰히 채워 나가야 할 것이다.
팝콘처럼 터지는 꽃무리들의 우아한 군무가 잠자고 있던 생명의 언어들을 흔들어 깨운다. 목청 가다듬고 소리 높이는 새들의 합창단에 들러리로 서서 두 손에 가득 담은 햇살로 불청객의 그림자를 지운다. 화려한 봄 날 관중 없이 불사르던 독백의 무대 위에서 봄의 반란은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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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명선/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