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오늘 하루 이 창 열지 않음닫기

“무덤덤해지다”

2019-04-30 (화) 노 려 웨체스터 지국장
크게 작게

▶ 기자의 눈

멕시코 불법 이민자 아이들을 그 부모와 떼어놓는 일이 뉴스를 장식할 때, 거의 30년 전에 본 영화 ‘소피의 선택(Sophie’s Choice)’'이 생각났다. 아이들이 한 대여섯 살쯤 되었을 무렵, 메릴 스트립이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은 이 영화를 ‘블록버스터’에서 빌려다 보았다. 서브타이틀도 없이 대충 줄거리를 따라가던 어느 순간에 ‘세상에!' 했다. 나치 군인은 장난치듯 메릴 스트립에게 가볍게 말한다. “둘 다 죽여야만 하지만, 너를 봐서 하나만 죽일 것이니, 죽을 아이를 네가 선택하라”

그 당시, 나는 내가 살아야 할 이유를 나의 두 아이에게 두고 있었다. 갑자기 엄마가 없어지면 내 아이들이 얼마나 불행한 인생을 살게 될까, 그 때문에 내 건강을 살피던 때다. 어떻게 자기 목숨보다 중한 아이들 중에 죽어야 할 아이를 엄마가 선택을 한단 말인가. 절규하던 메릴 스트립. 이 시대 멕시코 엄마의 심정이, 영화 속 소피의 마음과 뭐가 다를까.
그 정책을 시행했던 국방 안보장관 크리스틴 니엘슨(Christjen Nielsen)이라는 여성은, 나치도 아니면서, 피도 눈물도 없는가 했다. 하긴 요즈음 나에게서도 근본적인 인정이라는 것이 사라진 듯 하다. 요즈음 세상에서 벌어지는 온갖 잔인한 행정과 무자비한 학살 사건에 점점 무덤덤해지는 나를 본다.

오클라호마 폭탄 사건서부터 여지껏 유치원, 고등학교, 교회, 유태인회당, 나이트클럽 등에서의 총기사건 등 대량 학살 등을 수없이 보아온 내가 이제는 이런 사건에 무감각해져 버렸다는 것을, 스리랑카 부활절 테러 때 더욱 절감했다. 기독교인들이 어처구니없이 죽어 가던 날, ‘해피 이스터.’, ‘부활절 즐겁게 지내세요.’ 카톡 인사를 주고받으며, 화사하게 차려입은 교인들과 삶은 달걀을 먹으며 화기애애했다.


신문의 큰 제목만 보며, 또? 스리랑카? ‘이번엔 인명 피해가 좀 크네’하고 말았다. 그러면 지난 주말 캘리포니아 유태인 회당에서의 혐오 살인 소식에는 ‘뭐, 겨우 한명 죽었네’라고 해야 하나?

크리스천, 무슬림 그리고 유태인들의 하나님은 자기를 믿는 백성들이 이렇게 죽어가는 모습을 보고 계실 텐데. 하나님이 손수 만드신 아담과 이브는 곧바로 하나님을 어겼고, 아담과 이브의 자식은, 즉 하나님의 손자들은 형제지간에 살인을 저질렀다. 막나가는 인간을 하나님도 어쩔 수 없으신 것일까.

미국 어느 단체가 ‘Fortune’지가 정하는 500 회사에게 멕시칸 어린이를 격리시킨 트럼프 관리들을 어떤 형태로든 채용하지 말며, 특히 크리스틴 니엘슨을 절대 채용하지 말라는 서명운동을 벌인다는 소식이다. 하나님도 어떻게 못한 잔인한 인간과 그나마 정의와 사랑을 실현하려는 인간 사이의 줄다리기 같은 세상이다.

<노 려 웨체스터 지국장>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