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은 사상과 생활의 표현방식이다. 말의 기능은 형식에 머물지 않는다. 사람의 생각과 생활을 바꾸어 놓는 힘을 지니고 있다. 또 그렇게 작용하기 마련이다. 언어는 그만큼 단순한 표현의 형식기능을 훨씬 넘는 셈이다.
종교인들의 언어는 그 신앙의 표현도구이다. 그래서 바르고 정확한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 무심코 잘못 사용된 언어는 시간이 지나면서 잘못 사용되고 있다는 인식이 사라진다. 오히려 잘못된 언어가 지닌 의미에 의해 지배되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종교인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바로 알고 바로 쓰는 것이 중요하다. 잘못된 언어사용을 빨리 고쳐야 하는 이유다. 고침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교회서 사용하는 언어도 예외는 아니다. 교회 안에서 쓰는 언어의 오용이나 남용이야말로 궁극적으로 복음선교에 장애요인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교인들이 교회나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장 자주 쓰는 성경언어가 있다. 일명 천국언어라 할 수 있는 ‘할렐루야(Hallellujar)’와 ‘아멘(A-men)’이다. ‘할렐루야와 아멘’ 그 언어들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나. 또한 어떨 때 사용하는 것이 적절한 것인가?
할렐루야부터 살펴보자. ‘할렐루야’는 히브리 말이다. ‘할렐’은 ‘찬양하라’의 명령형이다. ‘루’는 ‘너희들은’을 뜻한다. ‘야’는 ‘야훼’의 준말로 ‘여호와’를 의미한다. 그러니 할렐루야는 ‘너희들은 여호와를 찬양하라’는 말이다. 구약성경 시편에 많이 등장하는 할렐루야는 문맥으로 보아 ‘여호와를 찬양하라’의 명령형인 것이다. 할렐루야는 그야말로 하나님께 하는 찬양인 셈이다.
문제는 일부 교인이나 목회자들이 할렐루야의 본뜻을 왜곡하고 올바르게 사용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교인들이 만날 때 할렐루야로 인사말을 하는 경우가 그렇다. 전화통화 시 첫 말이 할렐루야로 응답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초빙강사를 설교단에 안내하며 소개 할 때 손을 들어 할렐루야로 환영하자는 제안을 하는 것 역시 바람직하지 못하다. 물론, 신앙심이 깊어서 모든 말에 앞서 대인관계에서 ‘하나님을 찬양하자’고 제안하는 의미라고 합리화할 수 있다. 하지만 아니다. 인사법은 대인관계의 윤리적 행위다. 할렐루야는 대신적 관계에서 신앙적 행위다. 인사말 대용어로 할렐루야를 사용하는 것은 말의 뜻으로도 바르게 사용하는 것이라 할 수 없는 것이다.
초빙강사들이 설교단에 설 때 할렐루야를 호칭하여 환호적 표현을 하는 것도 생각해 볼 일이다. 그 같은 행위는 윤리적 차원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이 영화로워야 할 자리에서 사람을 환호하고 높이는 행위는 하나님 앞에 불경건할 뿐인 셈이다.
가장 심각한 것은 일부 부흥강사들이 말씀선포 때 말씀 대목마다 할렐루야를 연발하며 청중의 아멘을 유도하는 것이다. 청중의 아멘 소리가 적거나 작으면 큰 소리로 할렐루야를 중복 호칭하여 격양된 소리로 아멘토록 연동시킨다. 그 것은 종교심성적 욕구에 성취감을 주려는 기복신앙의 발상에 기인된 것으로 볼 수 있기에 시정되어야 한다.
그럼 아멘’은 무슨 뜻인가? 아멘은 ‘그 말 그대로 입니다’, ‘맞습니다, 옳습니다’의 뜻이다. 참 진실하다’,’그 말에 진실로 동의한다’는 긍정의 동의와 진실에 대한 맹세의 의미로 사용된다. 기도를 마칠 때 아멘으로 끝난다. 기도가 끝나기 전에도 중간중간에 아멘을 한다. 이것은 ‘그 기도를 하는대로 응답될 줄 믿습니다’하는 의미가 담겨 있다. 튼실한 교인들은 성경을 읽으면서, 찬송을 부르면서, 말씀을 들으면서, 응답을 주실 때, 아침에 일어나서, 취침 하기 전, 회의 할 때, 생명이 있을때와 마칠 때 등등 삶의 모든 경우에 아멘을 한다. 왜냐하면, 아멘이 다른 것이 아니라 순종하겠다는 다짐이라서다. 또한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이 아멘을 통해 오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교회 안에서 흔히 남용되는 말 역시 ‘아멘’이라고 한다. 출석을 부를 때와 서약을 하면서 ‘예’의 대용으로 ‘아멘’을 잘못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할렐루야’와 ‘아멘’은 성경 언어다. 그렇지만 적절하지 않은 경우에 큰 소리로 외치는 것은 바른 표현이 아니다. 믿지 않는 사람이나 새신자들에게는 저항감마저 줄 수 있다. 할렐루야와 아멘은 필요할 때에 적절히 사용해야 은혜스럽고 천국언어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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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창흠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