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선운사(禪雲寺)의 추억

2016-07-16 (토) 최원국 비영리기관 근무/ 팰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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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녀를 처음 만난 때는 어느 해 초가을 이었다. 매연이 가득한 공기를 마시면서 거리의 인파에 떠밀려 혼자 걷기도 힘든 복잡한 도시였다. 그녀를 만날 때면 호젓하고 경치 좋은 인근 산사의 오솔길을 가고 싶었다. 수북이 쌓인 낙엽을 밟으며 다정하게 걷고 싶었다. 아니면 시골의 황금 들판 길도 걸어보고 싶었다. 답답하고 번잡한 도시 보다 시원한 자연 속을 걸으면서 인생을 노래하고 싶었다.

우리는 그런 꿈을 안고 지내다가 직장 관계로 서로 떨어지게 되었다. 오랜 동안 헤어졌다 어느 해 5월 지방 소도시에서 그녀를 다시 만났다. 옛날 생각이 떠올라 한적한 산길을 걸어 보고 싶어졌다. 봄이라 그 근처에는 그녀와 같이 걷고 싶었던 낙엽이 있는 오솔길은 없지만 꽃과 봄의 향기가 있고 조용히 산책 할 수 있는 곳을 찾았다. 그렇게 찾아간 곳이 고창의 선운사 였다.

선운사는 구름 속에서 선을 수행하는 아름다운 이름을 가진 백제 때 세워진 고찰(古刹) 이다. 산사 주위에는 100여년이 된 1,000여 그루의 고목이 산재해 있으며 필 때보다 질 때가 서럽도록 아름답다는 동백꽃으로 유명하다.우리는 동백꽃 나무 사이의 오솔길을 걸으면서 선운사에 대한 시를 서로 기억해 가면서 그 동안 못다 한 이야기를 했다.


'선운사 동구'
선운사 골짜기로/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갔더니/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않았고/ 막걸리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 작년 것만 상기로 남았습니다/ 그것도 목이 쉬어 남았습니다.

-서정주의 '선운사 동구' 전문-
사월 하순은 동백꽃이 피는 절정의 시기이다. 그녀와 함께 선운사를 찾았을 때 동백꽃은 다 떨어졌지만 동백나무 잎새에 아직도 희미하게 남아있는 동백꽃 향기가 바람결에 코끝을 간지럽혔다. 꽃 피기 위하여 이른 봄부터 비바람을 맞으면서 힘들게 피었건만 우아한 자태를 뽐낼 시간도 없이 꽃이 진 것이다. 주위에 우거진 노송은 5월의 따가운 햇살을 막아주고 있었다.

고즈넉하고 적막한 고찰답지 않게 산사의 풍경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해질 녘이 되어야 세파에 시달려 지친 몸으로 시주를 등에 메고 가파른 언덕을 올라가는 탁발승도 볼 수가 없었다. 사찰 입구에는 현대식 높은 건물에 호텔, 노래방, 음식점, 선물 가게 등 도시의 풍경 이었다. 온통 상업주의의 냄새와 많은 눈동자들만 바삐 움직이고 있는 장사치들과 공존하는 사찰이었다.

아스팔트 주차장의 차량 소음 때문인지, 아니면 5월의 산뜻한 봄 향기를 마시고 싶어선지 선을 수행할 선인들은 볼 수가 없다. 구름을 타고 나들이 간 듯 깊은 도솔산만이 산사를 지키고 있었다.

이름 모를 산새의 울음소리와 경내의 흐르는 도솔천의 맑은 시냇물 소리가 서로 어우러져 봄의 교향곡을 만들면서 우리를 맞이하고 있었다. 우리는 옛날에 걷고 싶어 했던 낙엽이 있는 그런 길은 아니지만 봄 향기가 풍기는 산사의 오솔길을 산책하면서 잊어 버렸던 추억과 낭만을 상기했다. 그리고 우리는 1년후에 다시 만났다. 그때도 5월이었다.

선운사 인근 동구 밖에는 한 폭의 풍경화같이 아름다운 호수가 높은 산 속에 깊이 박혀 있다. 그 옆으로 야트막한 산자락 외진 곳에 카페가 한가하게 호수를 바라보며 자리 잡고 있다. 한옥 풍의 실내는 아늑하고 감미로운 음악이 흘러 나왔다. 분위기는 조용하고 편안한 느낌을 주었다. 분위기에 맞게 '내 마음은 호수'의 긴 이름을 가진 카페는 우리들에게 정담을 나눌 수 있는 안방같이 휴식과 마음의 여유로움을 주는 장소였다. 정이든 고향의 선술집에 가듯 우리는 이 분위기가 있는 카페보다 누가 기다리지도 않는 그 선운사를 또 찾은 것이다.

우리는 아직도 남아 있을지, 혹시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 모를 늦은 동백꽃과 향기를 마시고 싶었다. 도솔천의 시냇물 소리와 산 새소리만 여전히 우리를 반겨주었다. 깊은 산골짜기에서 부는 상쾌한 봄바람이 동백꽃의 희미한 향기만 얼굴에 스쳐 줄뿐 구름속의 선인도 동백꽃도 보이지 않았다.

또 한 번 선운사를 갈 기회가 생긴다면 나는 동백꽃 필 무렵에 가고 싶다. 숨 막히게 눈부실 정도로 만발한 정열의 동백꽃 향기를 취하도록 마시고 싶다. 싱싱한 풀내음이 나는 잔디에 앉아 선인이 딴 향기 그윽한 녹차를 마시면서 옛 정을 되새기며 잊어버린 '선운사 동구'의 시 구절을 서로 읊어 주리라

기차 바퀴의 쇠 소리 같은 노래방의 노래보다 은근하고 정감이 있는 투박하고도 무던한 여인의 목소리의 육자배기를 듣고 싶다. 요즈음도 5월이 되면 선운사가 생각난다. 잊지 못할 추억의 선운사다.

<최원국 비영리기관 근무/ 팰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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