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사는 이야기] 고백

2025-08-15 (금) 07:10:46 신석환/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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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 없는 새가 어디 있으랴.” 그러나 새는 상처를 고백하지 않는다. 새는 미물이어서 마음이 없으려니 짐작하지 마라. 새도 마음이 있고 생각이 있고 아픔이 있다. 그러나 고백하지 않을 뿐이다. 자기 혼자 상처를 삭인다. 상처 없는 새가 없듯 상처 없는 인간도 없다. 그러나 인간은 그 상처를 고백하기 좋아하고 위로받기를 원한다.

고백을 전제로, 슬픔을 나누면 슬픔이 반으로 줄고 기쁨을 나누면 그 기쁨이 배가 된다고 말하지만 새는 그런 경구를 모르는지 고백하지 않는다. 어쩌면 고백이 얼마나 허무한 것인가를 이미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상처를 안고 창공을 비상하다가 저 혼자 눈비를 맞고 홀연히 하직한다. 인간에 비해 늠름하다.

사람은 고백하기를 좋아한다. 틈만 나면 고백할 대상을 찾고 고백할 시간을 찾는다. 뭐든 가슴에 담아놓지를 못한다. 그저 어디에든 자기를 털어놓고 싶어 두리번거린다. 작은 상처도 사소한 아픔도 견디지를 못한다. 연약한 아이같이.


고백의 장치로 제법 긴 역사를 자랑하는 가톨릭의 고해가 있다. 현명한 제도이긴 하지만 사람에게 한다는 측면으로 보면 세속과 다름이 없다. 개신교에서는 목사와 상담을 장려하고 그 상담을 통해 고백의 욕구를 채워주려 하지만 고해(告解)성사와는 게임이 안 된다. 가톨릭 성장의 열쇠가 고백에 있다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고백은 고백을 받은 상대에게 고백의 비밀을 지켜 줄 의무를 지워 준다. 그러나 인간의 비밀은 입을 나가는 순간 광고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내가 얼마나 믿었는데!” 가슴을 치지만 고백이란 그 중량에 따라 전파 속도가 정확히 비례한다는 것쯤은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인간을 통하지 말고 신(神)에게 고백하는 게 그나마 최선이다. 그것도 어느 인간이든 하나라도 옆에서 고백을 엿 듣게 해선 안 된다.

고백은 아주 중대할수록 가슴에 깊이 묻어둬야 한다. 인간은 대체로 경망하기가 이를 데 없기 때문에 비밀을 품지 못한다. 발설하고 싶어 안달이 나고 입이 근질거려 참지 못한다. 그러니 세상에 비밀이 없다는 게 정설이어서 만에 하나 제3자가 어디서 주워 듣고 이러쿵저러쿵 말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추측의 범주일 뿐 내 입에서 나간 고백이 아니라면 “남의 말 사흘”일 뿐이다. 오히려 그런 뒷 담화를 비웃으면 된다.

시인 정호승의 시에 이런 부분이 있다. “울지 마라/외로우니까 사람이다/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갈대숲에서 가슴 검은 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내 사연을 함부로 꺼내지 마라는 뜻일까.

도요새의 가슴에 검게 타들어간 고백이 보이지 않는가 묻는다. 차라리 홀로 눈물을 흘리는 편이 의연하다. 인생의 가슴이라면 그래도 몇 가지 꺼내지 않은 일들이 담겨 있어야 할 일이다.

“눈을 감기 전에 털어놓겠다”는 한심한 모양도 연출하지 마라. 그렇게 털어놔서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건가. 나만 알고 있는 고백의 심연을 존중해야 한다. 고백이 입을 열고 나가는 순간, 3류도 안 되는 추한 신파가 될 수도 있고 항간의 “심심풀이 땅콩”으로 전락하기 십상이다.

팍팍한 삶을 고백으로 전환하려는 기대 역시 하지 않는 게 좋다. 고백의 많은 퍼센트는 자신이 만든 책임인 경우가 태반이다. 고백으로 그 책임이나 죄 성이 경감되기를 기대하지 않는 게 좋다. 고백을 차라리 신과의 대면을 위한 도구가 되는 게 그나마 낫다.

사람은 자기 기분을 위해 사람에게 고백을 택한다. 그러나 잊지 마라. 듣는 이는 고백하는 자의 기분을 십분 이해할 수 없다. 오히려 타인의 고백을 들으면서도 80%쯤은 엉뚱한 자기 생각에 사로 잡혀 있다. 그래도 신은 집중해서 들어준다. 물론 그 고백을 해결해준다는 보장은 없다. 결국 고백은 시간과 계절에 관계없이, 홀로 받아야 하는 형벌임을 기억하라.

<신석환/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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