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디지털시대에 다시 생각하는 ‘춘추필법 정신’

2016-06-09 (목)
크게 작게

▶ 창간사설

한인사회와 희로애락을 함께 해 온 미주 한국일보가 오늘로 창간 49주년을 맞았다. 결코 짧지 않은 세월동안 한국일보와 한인사회는 서로를 견인해 주는 동반자로서 같이 성장해 왔다. 한인사회의 눈부신 발전이 있었기에 한국일보는 선도적 언론매체로 뿌리를 내릴 수 있었다. 한편으로 한국일보는 한인사회가 나아가야할 정치적, 경제적 방향을 제시하는 나침반으로서, 또한 정보제공자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해 왔다고 자부한다.

시대는 빛의 속도로 변화하고 있다. 그런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면 도태되는 것이 생존의 냉엄한 논리다. 신문 또한 예외가 될 수는 없다. 미디어 환경과 기술은 하루가 다르게 바뀌고 있다. 이런 변화 속에 신문의 미래에 관한 담론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 담론들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은 종이신문의 절멸이다. 디지털시대가 본격화 되면서 종이신문의 종말이 머지않았다는 전망이다. 이런 우울한 예언이 나온 지도 벌써 20년이 넘었다. 하지만 종이신문은 아직 살아있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종이신문이 선사하는 촉감과 시각적 편리함을 선호하고 있는 것이다. 부정 일색이었던 종이신문의 미래가 일부 긍정적인 전망으로 돌아서고 있는 분위기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고민하게 되는 것은 디지털시대의 신문의 역할이다. 과거에는 정보제공자로서 신문의 역할이 컸다. 하지만 인터넷 등장으로 정보 제공 자체가 갖는 의미는 많이 퇴색했다. 정보의 양과 흐름의 속도가 엄청나게 늘어나고 빨라지면서 오히려 혼란스러운 상황이 됐다. 정보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너무 많아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신문의 새로운 역할이 생겨나고 있다. 정보홍수 속에서 신문은 단순 정보전달자가 아닌, 통찰력 있는 분석과 비판적 성찰 제공자로서의 역할이 요구된다. 방송매체들, 그리고 디지털매체들과 속보경쟁을 펼치기보다는 사안들을 다각도로 짚어보고 분석하는 ‘깊이’가 신문의 생존을 좌우하는 키워드로 떠오르고 있다. 실제로 상당수 유력 신문들이 이런 쪽으로 방향을 선회하고 있다.

그런 가운데 최근 인공지능이 뜨거운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인공지능을 갖춘 로봇기자들은 스포츠와 주식시장 시황 기사를 수초정도면 뚝딱 써낼 수 있다. 실제로 로봇기자들을 사용하는 언론들이 점차 늘고 있다. 그러니 사실보도와 표피적 분석만으로는 신문의 생존을 더 이상 담보할 수 없게 됐다.

독자들이 올바르게 이해하고 생각할 수 있도록 무수한 정보들을 추려서 깊이 있게 분석해 주고 방향을 제시해 주는 게 신문에 주어진 절대적 역할이자 동시에 새로운 생존전략이 됐다고 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신문이 어떤 관점을 갖고 사안들에 접근하느냐가 한층 더 중요하게 됐다.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공정함과 객관성은 신문, 나아가 언론 일반의 생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마침 올해는 한국일보 창립자인 백상(百想) 장기영 선생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창간을 맞아 그가 한국일보 사시로 내세웠던 ‘춘추필법의 정신’ ‘정정당당한 보도’ ‘불편부당의 자세’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본다.

‘춘추필법’(春秋筆法)은 공자가 노나라 역사서 ‘춘추’를 쓰면서 견지한, 객관적이면서 엄정한 비판의 자세를 흩트리지 않겠다는 정신을 말한다. 역사기록에는 그 어떤 권력 앞의 굴복이나 왜곡도 없어야 한다는 공자의 신념이 묻어난다. 신문의 자세 또한 이러해야 할 것이다. ‘춘추필법의 정신’은 곧 ‘정정당당한 보도’와 ‘불편부당의 자세’를 뜻한다.

급속한 변화의 시대일수록 더욱 더 기본으로 돌아가야 한다. 자칫 기술적인 발전에 휩쓸리고 매몰되다 보면 본질을 망각하게 되기 쉽다. 한국일보는 창간 사시인 ‘춘추필법의 정신’을 한시도 잊지 않고 언론 본연의 사명을 충실히 수행해 나갈 것을 다짐한다. 신문 미래에 대한 막연한 낙관론에 기대지 않고 기술적 변화에 뒤처지지 않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을 것도 독자들에게 약속한다. 아울러 지난 47년 동안 한결같은 애정과 성원을 보내준 독자들과 광고주들에게 감사드린다.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