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삶과 생각] 자기도취와 자기혐오

2025-08-18 (월) 07:33:23 한영국/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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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교토로 가는 기내. 짧은 거리지만 탑승과 하차 시간을 더하면 두 시간은 비행기에 갇힌다. 자리에 앉으니 같은 줄의 복도 건너에 아가씨 하나가 이미 자리를 잡고 앉아 있다. 거울을 앞에 두고 열심히 화장을 고치면서. 급히 출발하느라 미처 얼굴을 매만질 시간이 없었겠지 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아가씨는 그 자리에서 잠을 자거나 화장실 한 번 다녀오는 일 없이 출발부터 도착까지 내내 화장을 고쳤다. 계속 거울을 들여다보며 바르고 두드리고, 그리고 처음부터 다시….

도착을 알리고 사람들이 일어서는데, 아가씨는 그 촌각도 아꼈다. 기가 막혔다. 이런 사람들을 나르시시스트라고 하지만, 분명 ‘나’ 병이긴 한데, 그 양상이 내게는 달라보였다. 거기엔 자기혐오, 적어도 자기부정이 있었다.


아무리 화장을 고쳐도 그녀는 만족할 만한 자기 얼굴을 가질 수 없는 게 확실했다. 스스로 이미 그렇게 정해 놓았기 때문이다. 화장으로 덮을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한 태도가 아니라면 아가씨의 모습은 내게 꽤 괜찮아 보였는데,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바로 옆에서 가까이 보고 놀랐지만, 사실 도처에서 만나는 인물들이다. 지하철에도 흔하다. 이리보고 저리보고, 보고 또 본다. 이런 캐릭터들은 대개 남녀 공히 셀카 중독의 양상을 보인다. SNS에 올리기 위해서겠지만, 완벽한 각도에서 완벽한 자기 모습을 담느라 주위의 세상을 다 지우고 자신에게만 무진장 시간을 투자한다. 세상엔 자기와 자기를 쳐다보는 사람들, 그 두 부류만이 존재한다.

완전 소설적인 환상으로, 자신의 눈으로 무엇을 보며 시간을 썼느냐가 사후 천당과 지옥을 가르는 기준점이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내가 본 것의 거의 대부분이 ‘나’고, 지상의 시간을 쏟아 부은 전부가 ‘나’다. 염려한 것도 나 밖에 없고, 먹인 것도 나 하나고, 돈도 모두 날 위해서만 썼다. 결국 ‘나’는 세상을 살았지만, 내 우주에서 ‘나 홀로’ 산 거나 마찬가지다.

불교에는 ‘고독지옥’이라는 게 있다. 이것이 팔열지옥 중 하나이니 활활 타오르는 불길 같은 외로움 속을 무한 반복 헤매야 하는 상황이라는 얘기다. 업은 모든 감각기관으로 들어와 짓게 되는 것, 시각도 예외가 아니다.

내 시각에 담긴 게 오직 ‘나’ 하나뿐이라면 그 업이 얼마나 클까? 내 얼굴을 내가 볼 수 없어 특별한 도구를 사용해야 하는 건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리스 신화의 나르시스의 이야기로 풀자면, 자신의 모습에 빠져 드는 건 죽음으로 가는 길이다.

자기도취든 자기부정이든 거기 매몰된 사람들은 나이가 들면 어떤 삶을 살까? 자기도취의 사람들은 자기기만으로 가지 않으면 더욱 불행해질 것이고, 자기부정의 사람들은 깊어진 자기혐오로 더욱더 불행해질 것이다.

예쁜 것도 좋지만, 자기가 불행해질 걸 뻔히 알면서도 그리로 달려가야 할까? 어딘가에서는 멈추어야 한다. 어느 정도에서 만족해야 한다. 사회적인 압력을 가하지 말아야 한다.

나는 중요한 사람이지만, 그렇다고 세상의 중심은 아니다. 나를 쳐다보는 사람들의 집중된 시선은 8초를 넘기지 못한다. 그리고 그 8초가 지나고 나면 당신의 옆에 더욱 멋진 누군가가 모두의 시선을 잡아 끌고 있다. (틱톡의 세계가 대표적이다. 5초의 세계.) 젊음을 송두리째 걸 일이 아니다.

<한영국/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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