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그래, 살아 봐야겠다

2012-01-09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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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삶 속의 부처

겨울사막은 도도하지 않았다. 모래벌판에 부딪쳐 흩어지는 빛의 잔영들은 들끓지 않아 맑고 부드러웠다. 수수만년 ‘기억의 주름’이 잡힌 산맥과 산맥 사이, 그 죽음의 계곡을 흐르는 메마른 바람은 요동치며 울지 않았다. 그 바람은 앞선 바람의 흔적들을 어루만지듯 쓸고 넘어, 아스라한 사막의 지평 속으로 가만히 잦아들었다.

겨울사막의 숨죽인 그런 운신이 차라리 사막의 행색을 더욱 허허하고 적적하게 만든다. 눈 가는 곳마다 쓸쓸하다. 그러나 이 불모의 사막도 그 속살을 한 겹 들추어보면, 비록 있을 수밖에 없어 있는 것들이지만. 있을 수 있는 것들은 다 있는 곳이기도 하다.

여기, 있는 것들은 있기 위해, 태양과 바람과 밤이슬에 의지하며, 턱없는 결핍 속에서 생장에 필요한 최소한의 자양을 얻기 위해 강해져야 했다. 손쉽게 남의 자양물이 되지 않기 위해 더 강해져야 했다. 나아가 신산과 고투를 견디며, 때로는 맞이할 고독과 절망의 벽을 뚫고 한 걸음 더 내딛기 위해, 그것들은 보다 더 강해져야 했다.


길고 긴 시간의 풍화 속에서 발현되고 진화된 강력한 생명에의 의지와 내재된 역동적인 에너지는 경이롭다. 더욱이 그 생명력은 무한경쟁 속에서 한 순간도 긴장을 놓칠 수 없는, 언제나 ‘과정’이기에 그들의 삶은 대견하다.

그러므로 사막은 아주 빈, 절멸과 허무의 자리가 아니라 비었으되, 언젠가 싹 틔울 고운 꽃씨 하나 가슴 속에 간직하고 묵묵히 기다린 침묵의 자리였다. 또한 언젠가는 피어날 꿈이 여백으로 남아 있는 은유적 공(空)의 자리이다.

해서 이 황량하고 척박함 속에 더불어 사는, 작고 여린 풀꽃과 앙증맞은 새, 경계의 눈이 바쁜 도마뱀과 합장한 채 염불삼매에 든 다람쥐 등 기특하고 갸륵한 뭇 생명들은 물론, 짙푸른 하늘과 한가로운 구름, 이글거리는 태양, 검게 탄 바위와 반짝이는 모래밭, 타는 저녁노을, 구르는 마른 풀덤불마저도, 모래먼지와 그 매캐한 냄새, 새들과 바람의 소리, 산과 모래둔덕의 그림자며, 아득한 사막의 공허와 적막까지도, 한 생각 돌려 보노라니 모두가 아름답고 아름답다.

한 생각 삐끗하면 극락도 지옥이 된다. 한 생각 잘 비틀면 지옥도 극락이 된다. 그럼에도 정녕, 어두운 면만 골라보고 그 속에서 허우적거리기에는, 딱 한 번인 인생이 억울하다.

어느 때, 깊게 깎인 절벽의 끝머리에서, 어린 딸을 등에 업은 여인이 초점 잃은 눈으로 사막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바람에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여인의 초췌한 얼굴을 감싸고 있었다.

일생동안 겪을 고통의 총량을 한꺼번에 치른 듯한 모습이 처연하다. 그 속에는 이제, 남루한 삶을 마무리하려는 비관적인 의지가 스며 있었다. 그때 잠든 것 같던 아기가 엄마의 어깨를 톡톡 치며 말했다. ‘엄마, 저기’ 여인의 눈이 아기가 가리키는 손가락을 따라가자.

그 곳에는 선홍빛 노을이 마구 타오르고 있었다. ‘아! 아름다운 노을이구나.’ 신음 같은 짧은 탄성이 말라붙은 여인의 입술을 비집고 터져 나왔다. 회한이 서린 혼잣말이 나직이 이어졌다. ‘아가, 노을이 저리도 아름다운데, 엄마는 지금껏 세상 어두운 것만 보며 살아 왔구나.’

저녁노을로 온통 불콰해진 죽음의 계곡에 다시 바람이 분다. 머잖아 ‘연분홍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겠지. 그래 ‘바람이 분다. 살아 봐야겠다.’


박 재 욱 <나란타 불교아카데미 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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