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촛불시위와 직접민주주의

2008-06-13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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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영(전 언론인)

한국에서 한달 넘게 이어지고 있던 촛불시위가 6월 10일을 고비로 일단 소강 국면에 접어든 것 같다. 100만명 가까운 시위 참가자들은 이 달 20일까지 정부가 미국과 재협상하지 않으면 정권 퇴진을 위한 국민항쟁에 들어가겠다고 선언하였다. 지금까지는 평화적 데모였다면 앞으로의 사태 진전은 그 누구도 예측하지 못하고 있다.

정부의 대응 수위와 그 내용에 따라 위기는 평화적 종결로 매듭지어질 수도 있고, 유혈사태로 번져 정권의 명운을 가늠할 수 없는 최악의 사태로 치닫게 될 수도 있어 폭풍전야의 10일간이 될 것 같다.사태의 시작은 광우병 위험에 대한 안전대책을 세워달라는 것이었고, 지금도 이를 위해 재협상하라는 것이지 다른 정치적 요구는 없다.


EU나 일본은 물론 멕시코와 한국보다 국력이 약한 베트남까지도 거부하는 30개월 이상의 늙은 소, 위험한 뼈, 내장까지도 몽땅 수입하고 광우병이 발생하더라도 수입 중단 조치도 못하는 굴욕 협상을 왜 서둘러 체결하였을까? 시위 참가자들은 광우병 공포와 함께 민족적 자존심 훼손에 더욱 분노한 것 같다.

지금부터 21년 전, 서슬 퍼런 5공 군사정권의 체육관 선거를 끝장내고 국민이 직접 대통령을 뽑을 수 있도록 헌법을 고치기로 항복을 받아낸 시민항쟁 - 최루탄과 화염병, 쇠파이프, 각목이 난무하고 피투성이 구타, 연행, 고문, 투옥으로 얼룩진 살벌한 투쟁의 전투장이었다면 지금의 촛불시위는 처음엔 데모인지 놀이판인지 헷갈리는 축제의 한마당으로 시작되었다.

현장에는 어린 여중생도, 예비군 장정도, 넥타이 맨 샐러리맨도, 미니 스커트에 하이힐 신은 아가씨도, 유모차 끄는 아주머니도 참가하여 이명박 정부의 못난 짓과 실정(失政)을 맘껏 야유하
고 풍자하며 저마다 백가쟁명 식으로 정치적 견해를 발표하는 등 상큼하고 경쾌한 정치,문화의 놀이 공간이었다. 휴대폰, 디지털 카메라, 인터넷과 한 손가락으로 1분에 100자씩 치는 소녀들의 문자 메시지는 군중 동원과 홍보의 첨단 수단이었다. 정부는 재협상을 요구하는 시위 군중들의 요구에 대해 소나기는 피하고 보자는 식으로 ‘자율 규제’로 대응하였고 사람들은 이를 위기를 피해가려는 꼼수로 간주하면서 시위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이제는 쇠고기 문제를 넘어 새 내각, 참모진의 자질문제, 공기업 민영화, 교육 자율화 등 새 정부의 정책 전반에 대한 애당초의 불만이 전반적 불신으로 파급되어 뉴욕타임스 등 외국 매체들도 ‘정권에 대한 국민 불신이 문제의 핵심’이라고 지적하고 있다.시위 군중들은 이명박 대통령이 당초 왜 그토록 서둘러 국민건강을 위한 검역주권까지 포기하면서 미국의 비위를 맞춰 그들의 요구에 굴복하였을까? 하는 보다 중요한 문제에 의문을 던지고 있다. 자주권을 지키고 국가 이익을 추구해야 할 최고지도자로서의 자질을 의심해 나선 것이다.

앞으로 열흘 동안 국민이 요구하는 길로 나아가 사태가 수습된다면 합법성과 정통성이라는 프리미엄을 갖춘 정부로서 이명박 정부는 이 위기를 넘길 수 있을 것이다.시위 군중들도 세계 민주주의 역사에 유례가 드문 ‘직접민주주의’를 쟁취함으로써 훼손된 자부심을 되찾고 어떤 학자의 지적처럼 세계에 자랑할 정치 한류(韓流)로 이 촛불시위를 수출품화 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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