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칼럼/ ‘국민이 원한다면’

2008-06-06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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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영(고문)

이명박 정부가 출범 100일만에 실시된 지자체 재보선 선거에서 참패를 했다. 한나라당은 시장, 군수, 구청장 9곳 중 7곳에 후보를 내세웠으나 영남 한 곳에서만 당선자를 냈고 나머지는 야권과 무소속이 차지했다. 여당의 텃밭인 수도권의 3곳에서 완패를 했고, 영남에서도 참패를 했다.
광역의원과 기초의원 선거도 마찬가지였다. 민심이 정부에 완전히 등을 돌린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복수 후보가 출마한 대선에서 사상 최대 표차인 530만표 차로 2위 후보를 누르고 당선됐다. 그리고 이어 실시된 총선에서 한나라당은 과반 의석을 확보하여 정부여당이 정국을 안정적으로 주도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 그런데 어찌하여 두달이 지난 지금 이처럼 참패를 당하게 되었을까. 지지율 20%란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지지도는 온갖 말썽을 일으켜 지탄을 받았던 노무현 전 대통령 임기 말의 수준이다. 뭐를 잘못해도 크게 잘못했다는 말이다.


지금 정국의 최대 이슈가 되어있는 쇠고기 파동만 해도 정부가 국민들에게 미국산 쇠고기의 안전성에 대해 사전에 충분히 이해를 시켰더라면 이렇게까지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 정지작업도 없이 덜컹 개방 합의를 함으로써 반대 논리에 입지를 제공했다. 지금까지 이명박 정부가 해온 일을 보면 모두 그랬다. 정부의 구성이나 인사, 정책의 결정, 외교사안 등 모든 국정사항에 국민이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도외시했다. ‘강부자’ ‘고소영’ 정부라는 말이 나와도 들은 척하지 않았고 대운하 문제와 쇠고기 협상에서 추진력만 과시하면 잘하는 것으로 착각하는 듯 했다. 말로는 “국민을 섬기겠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고삐를 매어 국민을 끌고 가겠다는 식이었다.

여기에다 경제대통령이 당선된 후 한국의 경제는 더 어려워지고 있다. “경제 하나는 확실히 살리겠다”는 말에 BBK니 위장전입이니 탈세니 하는 흠을 모두 덮어놓고 압도적으로 지지했다. 그런데 무역적자와 인플레, 실업 등 경제가 악화되고 있다. 그의 경제공약은 점점 더 실현 가능성이 희박해졌다. 그를 뽑았던 국민들이 실망을 하여 눈에 콩깍지가 씌여 잘못 뽑았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사태에 대해 이명박 대통령은 “국민과 소통이 안되었다”고 했고 또 최근에는 “국민의 눈높이를 몰랐다”고 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다. 정부가 잘하면 국민을 저절로 알기 때문에 소통이 따로 필요 없다. 오히려 요즘은 소통이 너무도 잘 되는 시대이기 때문에 정부가 잘못하는 것을 국민들이 너무 잘 알게되어 이같은 소동이 벌어지고 지지도가 급락하게 된 것이다. 또 국민의 눈높이를 알 필요도 없다. 집에서 기르는 강아지도 주인이 정성껏 잘해주는 것을 안다. 정부가 국민을 위해 진심으로 헌신했다면 국민이 그 노력을 모를 리가 없을 것이다.

이번 쇠고기 파동은 이명박 정부를 흔들어대려는 선동세력이 배후에서 움직이고 있지만 많은 국민들이 이 선동에 공감하지 않았다면 이처럼 큰 정치문제로 확대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제는 미국 쇠고기 협정이 옳던 그르던 간에 수정해야 한다는 여론을 무시할 수는 없게 되었다.
문제는 광우병이 발생할 우려가 있는 30개월 이상의 쇠고기인데 한국정부는 미국의 반대를 의식해서 재협상보다는 미국측의 수출 자율규제를 바라는 입장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 정도만으로는 국내의 사태를 진정시킬 수가 없을 것이다. 미국측에서 문제삼고 있는 한국 자동차 수출에 관해 일부 양보를 하더라도 30개월 이상 쇠고기 수입을 금지하도록 재협상을 해야 할 것이다.

미국도 쇠고기 문제에 대해 더 이상 고집을 부려서는 안된다. 전례로 보아 한국에 수입된 미국산 쇠고기 가운데 30개월 이상의 소에서 도축된 쇠고기는 5%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고 한다. 이 5% 때문에 미국산 쇠고기가 전부 거부당하는 것보다 30개월 이상의 쇠고기를 수출 금지함으로써 판매량을 극대화하는 것이 국제수지상 이로울 것이다. 더우기 쇠고기 때문에 한국민의 반미감정을 강화시킨다면 미국의 국익을 크게 해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이다.

취임한지 겨우 100일에 정치적 수렁에 빠진 이명박 정부에는 정책문제 이상의 문제점이 있는 것 같다. CEO 출신인 이명박 대통령이 국민을 회사의 직원처럼 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가 바로 그것이다. 국민은 회사의 직원이 아니라 CEO를 뽑고 해임도 하는 주주들인 것이다. CEO가 주주들에게 이익을 제대로 주지 못하면 주주총회에서 책임을 묻는다. 국민들은 이명박 대통령이 잘할 것 같아서 대통령으로 뽑았지만 만약 잘못한다면 그 자리에서 끌어 내릴 수도 있다.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 대통령이 4.19혁명으로 대통령직을 사임하면서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을 물러나겠다고 하여 오래 유행한 말을 만들었다. 그렇다. 대통령이라고 하더라도 자기의 생각이 아니라 국민이 무엇을 원하는가에 따라야 한다. 그렇지 않고 자기가 원하는대로 한다면 국민의 준엄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이명박 정부가 지금의 위기에서 기사회생할 수 있는 길은 구구한 변명이나 정책과 전략을 강구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한 마디임을 명심해야 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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