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미래를 향한 길목에서

2008-05-29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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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준영(회계사)

너싱홈에 거주하는 노인들을 돌아볼 기회가 있었다. 각 개인마다 그들의 말, 행동, 표정에서 보여지는 것들, 그 속에서 그들이 살아온 과거, 그리고 미래를 보는 것 같았다.

과거가 미래를 만들어간다는 말은 살아 생전에만 적용되는 말이 아닌 것 같다. 살면서 쌓아가는 물질, 명예, 선한 일, 악한 일들, 그런 것들이 현재를 만들고, 또 미래가 만들어진다. 그 법칙(?)은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 서있는 노인들에게도 적용됨을 느낀다.의사, 간호사, 모든 직원들에게 늘 불만이 있는 이들, 세상사람 모두가 자신을 미워한다고 끊임없이 되뇌이는 노인, 무표정한 표정 속에 인생의 즐거움도, 가치도, 모든 과거조차도 망각해버린 듯한 표정, 지금의 나는 내가 아니라고 울먹이며 끝없이 도움을 호소하는 노인.또 한편으론 몸이 굳고, 손과 발에 고통을 끊임없이 느끼면서도 누구에도 불평하지 않고 감사하려는 이들, 그 안에서도, 열심히 살려고 운동도 하고, 기쁘려고 노력하는 이들... 알츠하이머의 그늘 속에서 천진한 아이로 돌아간 이들, 그리고 지난 날의 원망만이 남아 모두에게 소리치는 이들...


너싱홈에 들어가려면 자신이 가진 재산이 없어야 한다고 한다. 한달 경비가 거의 1만 달러 정도 들어가는데 재산이 있는 이는 그것을 처분해서 마지막까지 지불하고 그 이후는 무료, 정부에서 지급한다. 처음부터 재산이 없는 이는 처음부터 정부에서 지급한다. 결국 지난 인생 속에 쌓아온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버린 후에야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물질도, 명예도, 권력도, 아름답던 집도, 사랑하는 남편도, 아내도, 건강도, 젊음도 모두 가버린 상태다. 그리고 죽음이란 손님을 맞이하는 곳이 너싱홈이다.어찌보면, 모두들 같은 조건으로 돌아간 모습들이다. 세상에 태어날 때, 똑같이 벌거벗은 몸으로 태어나 세상에서 자신의 노력과 의지로, 그리고 환경과 타의로 인해서도 남들보다 더 잘 먹고, 더 즐기고, 혹은 그 반대로 더 힘들게 살아가고, 그러나 결국에는 다시 벌거벗은 모습으로 돌아갈 날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돌아간다는 말, 잘 어울리는 말 같다. 어디선가에서 빈 손으로 나와서 다시 빈 손이 되어 어디론가 떠나간다. 탄생이라는 문으로 들어와 죽음이라는 문을 통과하여 돌아간다. 그것은 같은 문이 아닐까? 누군가가 그 문으로 우리의 몸과 영혼을 들여보내고, 다시 불러들인다는 생각이 든
다. 창조자를 믿던 믿지 않던 결국 우리 인생은 탄생과 죽음이라는 입구와 출구를 벗어날 수 없다. 우리가 들어온 이 세상에서 무엇을 준비하는가? 어차피 떠나가야 할 이 세상을 위해 준비하는 것, 그런 시간들은 큰 의미가 없는 것 같다. 결국은 벗어버릴 옷들 아닌가?

죽음이란 출구는 그 건너편에서는 입구가 될 것이다. 그 죽음 건너의 세상을 준비하며 사는 것이 어차피 과거가 될 이 세상 삶에 의미를 더하는 것이 아닐까? 너싱홈에 있는 노인들에게서 또 하나 느끼는 것은, 죽음 건너편의 삶, 즉 천국과 지옥은 이미 죽음의 문 이편에서 보여진다는 것이다.

천국과 지옥은 죽은 후에 존재하는 곳이지만, 이미 우리의 삶 속에서 스스로 만들어가고 있음을 느낀다. 죽음을 기다리는, 그 문턱에서 대기하고 있는 이들의 말에서, 얼굴에서, 그들은 이미 그들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고 있음을 본다. 자신을 믿고, 세상을 의지하고 살아온 이들의 벌
거벗은 모습에서는 모든 것을 잃은 이의 아쉬움과 아우성을, 혹은 그 무표정함 속에서 철저한 포기를 느낀다. 그러나 자신을 의지 않고 겸손하게 절대자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 도움을 믿고 의지한 이들의 모습에서는 평안이 있고 이미 천국이 보인다.

평안치 못한 이들의 모습들을 보면서 지금이라도 자신을 내려놓기를 간구하고 권하지만 이미 지난 삶 속에서 뿌리까지 말라버린 이들의 가슴이 부드러워지고, 물이 흐르는 것을 보기 힘들다.아직은 죽음의 문 앞에서 번호표를 받지 않은 이웃 형제들의 삶이 천국이란 미래로 가는 축복된 과거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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