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조승희 사건 1년을 지나며

2008-05-08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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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준영(회계사)

무고한 인명 32명이 죽었었다. 누군가의 편견, 증오, 차별과 조롱 속에서 탄생한 증오로 뭉쳐진, 어찌보면 그 역시도 희생자일 수 밖에 없는 자, 그가 당한 고통과 죄 때문에 왜 그와는 상관도 없는 이들이 희생당해야만 하는가.

인간의 논리로 죄의 댓가는 죄진 당사자가 받아야 한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가 인간 정의의 법칙이다. 다른 이가 대신해서 그 댓가를 치를 수 없다. 그를 위해 오히려 우리 사회에서는 엄청난 죄를 진 자도 증거 불충분 등으로 그 댓가를 치르지 않는 경우가 적지않다.승희가 당한 고통과 그에 의해 희생된 이들 속에 흐르는 공통적인 면, 그것은 그 원인과 결과 속에 존재하는 불특정 다수라고 할 수 있다.그는 자신이 당한 그 고통을 그것을 준 이에게 돌려줄 수 없었다. 대상도, 시간도, 장소도 이미 지나쳐 버리고, 그의 머리 속에는 그 죄악의 열매인 증오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그 증오가 또 다른 불특정 다수를 향해 터져나온 것이다.


이해될 수 없는 사건들, 그 속에는 어쩌면, 믿던 안 믿던 필연적으로 신의 존재가 개입될 수 밖에 없지 않을까? 우연이라고 넘겨버릴 수만은 없기에 그 뜻을 생각해 본다.알 수 없는 누군가의 죄를 내가 대신해 받아야 한다고 할 때, 우리는 결코 그를 정당화하지 못한다. 만일 신이 내게 그를 요구한다면 차라리 신을 거부할 지도 모른다.개개인의 인간과 그 존엄성을 무시하는 신은 더 이상 인간의 신일 수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신은 인간 개개인과 각 개인의 삶을 무시 혹은 경시하는 것일까?

우리는 각자에게 주어진 삶의 의미와 중요성을 현재의 보이는 시간 속에만 둘 때, 그 대답은 그렇다고 해야 할 것이다.그러나 나에게 주어진 현실의 삶을 영원 속에서의 그것에 연결할 이유가 있다면 나에게도, 인
류에게도, 신에게도, 우리의 현재 삶은 그 의미가 달라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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