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칼럼/ 중국인 폭력시위가 의미하는 것

2008-05-02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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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영(주필)

북경올림픽 성화 봉송을 계기로 서울에서 벌어진 중국인들의 폭력시위는 한국인들에게 중국이라는 나라를 새롭게 인식해야 할 필요성을 일깨워 주었다. 성화 봉송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중국인들이 떼를 지어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고 오성홍기가 서울 거리를 휩쓸었던 이번 시위는 거의 난동 수준으로 홍위병의 악몽을 떠올리게 한다. 성화 봉송을 보호하고 치안을 확보하는 것은 한국 경찰이 할 일이다. 그런데 중국 시위대가 도맡겠다고 나섰으니 이들이 한국의 공권력을 행사하겠다는 것이었는지, 또 한국이 주권국이라는 것을 망각한 것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보도에 따르면 성화봉송 구간에 중국인 6,500여명이 몰려 나왔고 이들은 오성홍기를 휘날리며 중국말로 중국 찬양 구호를 외치면서 성화봉송 반대 시위자들에게 플라스틱 물병과 돌멩이 등을 마구 던졌다는 것이다. 시청앞 광장에서는 중국인들이 반중국 시위자들에게 “다 때려죽여라”고 외치면서 달려들어 주먹을 휘두르고 발로 짓밟았으며 호텔 안까지 쫓아들어가 폭행하면서 소란을 피웠다. 이 과정에서 경찰관과 기자도 폭행을 당했다. 시위는 평화적인 의사 표시에 그쳐야 하고 만약 폭력화 한다면 공권력의 제지를 받는다. 그런데 이 시위는 폭력이 난무했고 공권력은 무력하기만 했다.


이같은 사태에 대해 중국측은 한 마디의 사과조차 하지 않았다.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시위대의 “일부 과격한 행동으로 경찰관과 기자 등이 부상했다”면서 “부상자들에게 위로의 뜻을 전한다”고 했다. 그러나 사과나 유감의 뜻을 표하지 않은 채 중국인들의 행위에 나쁜 의도가 없었다는 점만 강조했다. 한국 외교부를 방문한 주한중국대사도 사과나 유감은 표명하지 않고 성화 봉송에 한국정부가 협조해 준데 대해 감사만 했다. 이러는 그에게 한국의 당국자가 유감을 표명했다는 것이다.이번 사태를 보고 흥분한 한국 국민들은 정부의 미온적인 태도에 불만을 표시했고 관련자들을
색출하여 엄벌할 것을 바라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사건의 확대를 자제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만약 한국이 중국인에 대해 강경한 정책을 취하면 중국 내에 반한감정이 고조될 것이고 그럴 경우 중국 내의 한국기업과 유학생에 대한 보복행위로 이어질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어느덧 한국이 이처럼 중국에 발목이 잡혀있는 것이다.

그런데 만일 이런 사건이 중국에서 발생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한국인들이 북경 시내에서 태극기를 휘날리면서 폭력시위를 벌여 중국인들을 무차별 구타했다면 아마 무사히 넘어가지는 못했을 것이다. 사건 관계자는 물론이고 한국정부가 머리를 조아리고 사과를 해야 할 것이다. 그보다도 그런 일이 일어날 수조차 없을 것이다. 또 중국인들이 뉴욕의 맨하탄에서 폭력시위를 벌여 미국인과 경찰을 폭행하는 일이 감히 일어날 수 있을까. 아마 생각조차 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면 왜 이번 사태가 발생했을까. 중국인들에게 한국을 얕잡아 보는 심리가 되살아나고 있기 때문 아닐까. 한국인들은 일제 36년간의 식민 지배에 대해서는 말하지만 유구한 역사를 통해 2000년간에 걸친 중국의 직접 간접 지배에 대해서는 잊고 있다. 고대에 한사군이 설치된 이후 청일전쟁에서 일본에 패배할 때까지 중국은 한반도의 종주국으로 행세해 왔다. 구한말에는 임오군란으로 대원군을 납치해 간 후 수구파를 조정하여 한국을 식민지화 하려고 획책했다. 선각자 서재필은 청나라의 사신을 영접했던 영은문을 헐고 그 자리에 독립의 상징인 독립문을 세웠고 청나라 사신에게 연회를 베풀었던 모화관을 헐고 그 자리에 독립관을 세웠다. 그 당시에는 중국에서 벗어나는 것이 바로 독립이었다.

중국이 다시 세계 대국으로 떠오르면서 주변 소국에 대한 지배욕이 되살아나고 있다. 최근 티베트 사태가 단적인 예이다. 더우기 역사왜곡 등으로 중화민족주의를 부추키고 있는 이 시대에 새로 자라나는 신세대 중국인들은 우월감과 자부심이 매우 크다고 한다. 이런 중국인들이 한국을 가볍게 보고 있는 것이 이번 사태에서 역력히 엿보이고 있다.
한중수교 이후 중국은 한국과 가장 관계가 밀접한 나라가 되고 있다. 유학이나 비즈니스 등 인적교류가 가장 큰 나라이다. 앞으로 중국인들이 이번과 같은 사태를 계속 일으킨다면 참으로 골치아픈 일이다. 외교적 마찰과 양국 국민감정의 악화는 물론 중국이 자국민 보호를 이유로 어떻게 나올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이런 상황에서 앞으로 중국과 사업상 이해관계가 있거나 유학 등 영향으로 친중파가 늘어나면 한국의 국익에 위기가 닥칠 수도 있다.

그러므로 한국은 이제 새로운 시험대에 올랐다. 대중관계를 눈앞의 이익에만 급급하지 않고 장기적인 국가안보 차원에서 어떻게 정립하느냐는 어려운 과제를 풀어나가야 한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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