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빈(貧)

2008-05-01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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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태(시인)

모자라거나 가난하면 빈자(貧者)라는 소리를 듣는다.
살기가 힘들 정도로 가난하면 빈민이란 소리를 듣고 그런 사람들이 모여서 살면 빈민촌, 또는 빈민굴에서 산다는 소리를 듣는다.나라의 경제가 어려워 북한이나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처럼 굶은 사람이 많으면 아무리 위력이 센 무기를 가지고 있더라도 빈민국이라는 처량한 소리를 면치 못한다.
산 사람도 피가 모자라면 빈혈이라 어지럼증을 달고 다닌다. 주머니에 쓸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으면 빈 주머니이고, 아무리 염불을 잘 해도 도학이 깊지 못하면 빈승이란 소리를 면치 못한다.

빈자소인(貧者小人)이란 말이 있다. 아무리 배운 것이 많고 학벌이 좋아도 가난한 사람은 있는 자에게 굽죄이는 일이 많아서 기를 펴지 못할 뿐만 아니라 자기 스스로 자기를 낮고 처량한 사람으로 만든다는 말이다. 경제의 나라 미국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대학의 교수면 무엇하고, 변호사면 무엇하나! 지붕이 낡고 벽이 허름하면 제대로 배우지도 못하여 남의 집 잔디나 하수도를 손보러 다니는 사람마저도 배웠다는 사람들을 거들떠 보지 않는다. 역시 돈이 좋다. 돈이 있으면 무식한 얼굴도 번쩍 번쩍거린다. 얼굴에서 번쩍거리는 그 색깔이 볼상 사납게 천하기는 하지만 그러나 낮에도 땀흘려 일을 하고 밤에도 손톱 밑에 까맣게 낀 때를 씻어낼 생각도 없이 하품을 계산기에 덧보태며 장사를 한다. 가난은 무식보다 더 싫기 때문이다.


그러나 없는 것도 못마땅하고 서글픈데 이상하게도 그런 집에는 번거로운 일이 많이 생겨 나가야 할 돈 또한 생각 밖으로 많다. 바다에다 퍼다주고 퍼다주어도 남아도는 강물같으면 있는 것 얼마든지 퍼다 주겠는데 돈이란 쓰고나면 아무 것도 없다. 그러나 한 푼을 쓰는데에도 이 생각 저 생각 궁리가 많을 수밖에 없다.요새는 부모 잘 만난 복이 반복이라는데, 가난한 부모에다 억울하게도 빈상(貧相)으로 태어난 사람은 그의 가난한 팔자 탓을 억지를 써서라도 조상으로 돌릴 수도 있겠지만 복상(福相)을 가지고도 빈자의 자리를 벗어나지 못한 사람은 탓을 하고 싶어도 탓해야 할 곳이 없다.

빈자나 부자의 탓은 바로 자기이기 때문이다. 빈자나 부자에게는 반드시 보이지 않는 이유가 있다. 끈기와 노력이 있으면 부자가 되고, 카지노다 화투방이다, 올바른 투자가 아니라 일확천금을 노리는 투기나 향락가를 전전하며 있는 것을 조금씩 조금씩 허비하다 보면 있던 사람도 빈털털이가 된다. 또한 본의던 본의가 아니던 버는 돈보다 씀씀이가 많은 사람이나 남에게 돈을 빌려서라도 우선 편하게 쓰고보자 하는 이런 사람들은 가난하기를 작정한 사람들이다. 블랙잭이란 놀음판을 보면 블랙홀로 빠져 들어가는 그림이 환하게 눈에 보이는데도 놀음을 하는 당사자들은 그게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대부는 재천이요 소부는 근면이라고 명심보감에서 말을 하고 있으나 이는 예전 농경시대에서나 맞는 말이고 경제 만능시대인 현대에 와서는 “재벌은 재천이요, 중산층은 근면”이라고 해야 맞을 것 같다.
근면이란 투기가 되지 않기 때문에 근면한 사람은 우선 생활과 삶에서 올바르고, 또한 근면한 사람은 우선 스스로를 비롯하여 자기 가족과 몸담고 있는 자기 직장과 직장 조직을 책임질 줄 안다. 근면은 믿음이다. 그래서 근면한 가장을 가진 가정은 행복하고 근면한 직원을 가진 회사는 사무실이 환하다.

가난은 죄가 아니지만 무책임인 것만은 부정할 수가 없다. 팔을 걷어부치면 못할 일이 없고 목숨을 내걸고 하는 일에는 체면이고 학벌이고 없다. 그런 사람 그늘 밑에서 사는 사람은 그 사람에게 마음놓고 기댈 수가 있다. 이민사회에서 가난을 면치 못하는 사람은 아직도 체면이 남아있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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