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비단으로 감은 이름들

2008-04-29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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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봉옥(MOMA 근무)

몇 10년 전 어느 누구가 이름을 풀어 사주를 잘 본다기에 우리 네 식구의 생년원일과 이름을 한자로 적어준 적이 있었다. 재미있을 것 같았고 궁금하기도 해서 한문을 잘 아시는 엄마와 함께 갔었다.내 남편의 이름은 규(圭)자 돌림의 장남이어서 시부모님이 심사숙고 하신 뒤 이름을 정해주셨고, 나는 귀한 첫번째 딸이라고 아버지와 엄마가 그 분들 성함의 제일 끝 자를 합쳐 나에게 주셨으며, 우리 아들은 진(鎭)자 돌림으로 시작되는 이름을 시부모님이 보내주시어 그 중 제일 우리 마음에 드는 것을 골랐고, 우리 딸은 란(蘭)이 들어가기를 원하셨던 이모할머님의 뜻을 받들어 아름다운 이름을 우리가 붙여주었다.

어떻게 연관이 되는 것일까? 몇 번 재미있게 훑어보고 장롱 속에 넣어두었던 그 이름풀이를 지난 주 우연히 발견하고 다시 한번 한 자 한 자 읽어내려 갔다.마치 한시를 엮어놓은 듯 우리 네 식구의 특징이 또박또박 담겨있는 구절들 - 정말 그랬었구나, 정말 그렇구나! 난 우리 넷의 이름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새삼 느껴보았다.우리들이 물려받고 우리 애들에게 물려준 바로 그 이름들이 마치 우리 넷을 똘똘 뭉쳐준 근본 원인인 듯 그런 따뜻한 뭉클함을 느끼고 있었다. 다른 이름들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이름이 주는 인상과 그 의미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참 중요한 것 같다. 히브리 말로 Adam은 ‘남자’이고 Eve는 ‘숨을 쉰다’는 뜻으로 해석했다. 창세기에 나오는 이 두 사람에게 딱 맞는 이름이다.10세기 전만 해도 서양사람들은 첫번째 이름(First Name)을 사용했다고 한다. 차차 부락의 인구가 늘고 이 고장 저 고장 물품교환을 하러 여행을 다니게 되면서 같은 이름에 혼동이 생기기 시작했고 다른 이름 하나가 서서히 덧붙여지기 시작했다. 그들의 성(Last Name)은 직업, 지위, 장소 등을 많이 이용했다. Washington이 그렇고 Gardner, Chaplin이 또한 그렇다. 예를 들어
Johnson은 John’s Son에서 온 것이다.나는 어쩌다 대대로 내려오는 족보의 이름들을 보며 언제, 어디서, 어떻게 이런 이름들을 정해 놓았는지 정말 궁금해 할 때가 많았다. 남편은 전주 이(李)씨이고 나는 배천(白川) 조(趙)씨인데 어떤 이가 아- 나도 그 곳인데 하면 마치 한 부락에서 함께 자란 친지처럼 무턱대고 반가워지기도 한다.

작년에 동생이 족보를 찾아 보내주었다. 배천 조씨의 조상은 중국 송태조의 손자 중 한 사람이 고려 경종(979년) 때 화를 피하여 황해도 배천군에 정착하여 이름을 바꿈으로써 조씨의 시조가 되었다고 적혀 있었다. 나는 그 분의 29대째 후손이다. 그야말로 한 사람의 직업, 지위, 장소가 우리 이름을 탄생시켰던 것이다.내가 물려받은 소중한 그 이름을 어떻게 생각해 내셨을까? 내가 좋아하는 우리 전설 중 하나를 간략하게 여기 소개한다. 이름 때문에 더 아름다운 산(山)의 이야기다.

<고려 왕실을 무너뜨리고 이씨조선의 태조가 된 이성계가 새 나라의 천만년 보존을 위해 팔도강산의 명산을 돌며 산신께 빌러 다니기로 결정을 하고 군신들과 함께 곧 길을 떠났다.그의 행차가 지리산에 이르렀을 때 그는 홀로 험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거센 바람, 천둥번개 속에서 그는 무릎을 꿇고 하늘을 우러러보며 산신께 창업을 길이길이 지켜달라고 빌고 또 빌었다. 산신은 그에게 고려를 탈취한 놈이라고 욕을 퍼부으며 내쫓아 버렸다. 지리산에서 큰 무안을 당한 이성계가 마지막으로 찾은 곳은 남해의 금산 - 소년시절 높은 영봉에서 사서삼경을 읽으며 왕도(王道)를 공부했던 바로 그 산이었다. 산신이 그에게 말을 했다.

이씨 왕조가 무궁히 빛날 것이니 만백성을 잘 다스리는 군신이 되라고.
너무 고마운 이성계가 고개를 숙여 감사하며 이처럼 축복해 주시는 신령님께 은혜를 보답해 드리겠노라 요청을 했다. 신령이 아무 보답도 필요 없다고 했을 때 이성계가 맹세를 했다. “이 산을 해마다 고운 비단으로 싸게 하여 더욱 아름답게 해 드리겠습니다”그러나 이는 나라가 망할 일이었다. 둘레만 해도 80리가 넘는 산을 해마다 비단으로 감싼다니? 몇 날 몇 밤, 식음을 전폐하고 끙끙 앓고 있던 어느 날, 한 늙은 재상이 묘안이 있다고 머리를 조아렸다. 그 영산의 이름을 비단 금(錦)자로 하사하면 매년 비단을 안 써도 영원토록 비단산이 되어 길이 그 아름다움을 지킬 것이라는 지혜로운 생각을 해낸 것이었다. 남해의 금산은 이렇게 이름에 너무도 걸맞는 비단금산이 되어 영원토록 아름다운 비단으로 둘려있게 되었다.>

나의 사랑스러운 이름들 - 난 우리 식구 이름들을 하늘색 비단 보자기로 다시 잘 싸서 늘 차지하고 있었던 내 장롱 속 뒤쪽에 고이고이 보관해 두었다. 내년에 또 한 번 읽어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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