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지지 않는 꽃

2008-04-24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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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경자(시인/IM갤러리 원장)

한달 내내 아래층의 방 하나를 온통 어질러가면서 꽃을 만들고 있다. 돋보기 안경에 바늘, 실, 온통 헌 옷 조각들 속에 파묻혀 꽃을 만들어내면서 나도 슬그머니 꽃처럼 피어나고 싶어진다.
아이들의 입던 옷, 몇 십년을 입어온 나의 옷가지들, 색 바랜 옷, 안감들, 그 어떤 꽃도 내가 만들어보는 꽃을 만들기에는 부족함이 없다. 새 옷감으로 바느질을 할 때의 느낌과는 또 다른 어떤 그윽한 기쁨(?)이 나를 인간임의 행복에 젖게 한다. 우리가 감정과 예술심을 가지고 사는 것이 얼머나 아름다운지 그것이 이렇게 고마웁다.

얼마 전, 미국인 화가가 리사이클 아트를 해보자고 건의를 해 왔다. 한국에서는 가끔 재활용 예술품 전시를 하기도 한다고 들었지만 간단한 공예나 실용품을 만들어 쓰도록 권장하는 정도에 지나쳐 왔었다. 이 새로운 제안이 올 봄, 나의 삶을 이렇게 새로이 창의욕에 넘치도록 해 줄 줄이야.
우선 전문 갤러리와 예술가들과 리서치로 네트웍을 만들어 정보를 교환하고 내 자신이 공부(?)를 좀 해야 했었지만 곧 작품에 몰입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일이 주는 매력(!!!)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대개의 사람들은 필요하면 쉽게 사고, 쓰고나면 그냥 쉽게 버린다. 그리고 그 과정을 그림처럼 좀 보자면 함부로 쓰고, 쓴 후에는 그냥 귀찮은 듯이 버리는 그런 그림을 그려보니 그것이 마
치 우리네 인생처럼 비애스럽게 느껴진다. 재활용, 재창조, 인생과 예술, 세월과 인생 등등.. 생각을 해 보면서 주변을 살피니 온통 다시 쓸 수 있는, 다시 무엇인가 창조해내고 싶은 애정이 생기는 것이다.

늘 버려왔던 쥬스 박스, 콜라병의 마개, 포장지, 샤핑백, 누구에게 물려주기에는 너무 늦어버린 내 옷, 아이들의 체온과 추억이 얼룩진 헌옷... 이 모두가 이제 내 마음과 손에서 꽃으로 태어나고 있다. 일부러 색을 내지 않고도 이런 저런 옷의 색깔 천을 가지고 꽃을 만들고 고정된 관념과 틀을 깨고 정말 자유로이, 내 마음이 가는대로 만들고, 부수고, 또 만들고... 정말 괜찮다 할 때까지 만들고, 보고 또 본다.

이 분야의 작가들도 다양해서 만들어가는 과정을 즐기는 것으로 만족하는 이, 예술·창작성을 집중적으로 하는 작업을 하는 이, 상품화가 되도록 만드는 이, 꼭 작품의 성향이나 메시지를 따로 분류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아무튼 다양하다. 나는 재창조와 재활용, 그 두 가지를 다 중요하게 느끼고 있다. 무엇보다 이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자신의 시간으로 돌아오는 기쁨과 문명에게 맹종이 아닌 깨어있는 마음으로 동행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다.

나는 수 십개의 꽃을 접고 만들고 있다. 집안에서 그 자료를 찾기에 충분했으며, 내 주변은 정리되고 새로 탄생하는 작품으로 나는 행복하다. 꽃을 만들 때 나와 또 다른 나를 보면서 꽃을 만들어 간다. 지난 시절엔 하고 싶었던 일과 할 수 있었던 일의 차이, 그리고 젊은 날 느껴오던
화려한 꿈... 그런 것도 이 시간엔 다소곳이 내 옆에서 미소짓는다. 이제 지금 하고 있는 이 일이 이 나이까지 살아온 나를 돌아보게 한다.
지나간 세월 속의 내 모습 속에서 나를 안스럽게 바라보고, 아주 차갑게 야단치기도 한다. 그러나 그 모든 순간이 현재의 나에게는 소중하게 남아서 나와 함께 하고 있는 것이다. 언젠가 그 때 입었던 옷, 이 낡은 기억에서부터 나는 다시 생동하기로 작정한다.

자신이 진지한 의식과 애정을 느끼면서 주변을 보면 모든 것은 더 소중하고 지나간 것도 헛됨 없이 나를 따라와서 지금의 나를 향해 지지 않는 꽃으로 존재해 주는 것이다. 지금 내가 만들고 있는 이 꽃잎은 이제껏 많이 때 묻혔고 씻기고 닳아서 세상 앞에 오히려 깨끗하고 순결하다. 시들지 않아서 ‘지지 않는 꽃’으로 남으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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