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적이 있어야

2008-04-21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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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효섭(아동문학가/목사)

새로 만들고 있는 양키 야구장 공사장에서 일하고 있는 노동자 두 사람이 뉴욕포스트지에 제보하였다. 방문 팀 탈의실이 될 자리에 보스턴 레드삭스 팀의 유니폼을 묻고 시멘트가 부어졌다는 것이다. 그들이 현장을 목격하지는 못했지만 레드삭스 유니폼 한 벌이 분명히 공사장에 있었는데 시멘트가 부어진 뒤 유니폼이 사라진 것은 레드삭스 팬이 양키즈 팀이 영원히 저주하려는 흉계라는 주장이다. 두 팀이 오랜 숙적이다 보니 이런 해괴한 이야기까지 나오는 것이 아니겠는가!

두 팀의 저주 이야기는 역사가 오래다. 1918년에 보스턴 팀이 세계 챔피언이 되었는데 바로 이듬해에 강타자 베이브 루스를 뉴욕에 팔아먹은 것이 저주가 되어 그 후 86년 동안이나 챔피언이 못되었다는 이야기까지 있다. 스포츠에 따라다니는 것이 ‘숙적(라이벌)’인데 사실 숙적이 있어야 팬의 흥미도 돋구고 아군도 경쟁심리가 있어 강해진다.


서구 교회가 퇴조하는 원인이 무엇일까? 전도를 열심히 안 해서인가? 로렌 미드 박사는 그의 저서 ‘옛 교회와 미래의 교회’에서 유럽이나 미국의 교회는 너무나 오래동안 적이 없었기 때문에 힘을 잃었다고 주장한다. 콘스탄틴 대왕이 식민지 주민을 강제로 기독교화 하고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하면서부터 교회는 적을 잃게 되었다. 너무 편안하면 부패하기 십상이다. 초대교회 교인들은 목숨 걸고 예수를 믿었기 때문에 비약적인 발전을 하였다. 소위 모태신앙이나 저항 없이 예수를 믿을 수 있다는 것이 반드시 좋은 환경은 아니다. 한국교회는 일제의 탄압, 공산주의의 핍박 등이 이어져 신앙의 불이 꺼질 틈이 없었다. 그것은 고통이 아니라 부흥을 위한 축복이었던 것이다.

뉴욕에 사는 사람은 억수같은 비가 쏟아질 때 기뻐할 이유를 가지고 있다. 허드슨 강에 ‘솔트라인(Salt-line)’이라는 것이 있다. 민물과 바닷물의 경계선을 가리킨다. 가물면 바닷물이 솔트라인을 포킵시까지 밀어올려 수원지를 위협한다. 비가 쏟아지면 민물의 세력이 강화되어 솔트라인을 바다쪽으로 밀어낸다. 이 민물과 바닷물의 싸움은 잠시도 쉬지 않고 허드슨 강에서 진행되고 있다. 비가 와서 교통이 막힌다고 불평할 것이 아니다. 뉴욕의 맛있는 수돗물을 위하여 민물이 싸우고 있음을 기억하고 비에게 감사해야 한다. 불황도 그렇게 받아들이면 장차 크게 성장할 수 있는 정신적 준비의 기간이 될 수 있다. 나트륨(Sodium)도 녹이고 염산물인 클로라이드(Chloride)도 표백제로 쓰는 독이다. 그러나 이 두 독약을 결합시키면 염화나트름(NaCl) 곧 소금이 되어 맛을 낸다.

괴로움을 극복하는 길은 나를 괴롭게 하는 상대나 사건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협조함으로써 서로가 살 길을 모색해야 한다.
벤유 레이(Benyou Ray)교수는 장애자 특수심리 전공이다. 그는 많은 장애자를 관찰 연구하고 이런 재미있는 결론을 내렸다. “아무도 장애 없이는 성공하지 못한다. 아무도 장애 때문에 성공할 수도 없다. 모든 성공 뒤에는 반드시 장애물이 있었다” 영국 속담에 ‘개구리를 삼키려거든 너무 오래 들여다보지 말라. 여러 마리를 삼키려거든 큰 놈부터 삼켜라”라는 재미있는 말이 있다. 고통을 극복하는 지혜를 유머 있게 표현한 속담이다.
세상에 참을 수 없을만한 상실이란 있을 수 없다.

세월이 흐른 뒤에 생각하면 어떤 상실이든 다 참을 수 있고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기에 슬기로운 사람은 외부의 사건이나 상실때문에 나의 영혼을 도둑질 당하지 않는다. 고통을 당하면 온갖 수치를 다 드러내는 사람이 있고 차분히 싸우며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

유대인 소녀 작가가 나치 통치 때 다락에 숨어 살던 체험을 쓴 ‘안네의 일기’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드디어 숨어있던 은신처가 발각되어 게슈타포가 문을 두드리는 요란한 소리가 울려왔을 때 아버지 오토 프랑크는 조용히 가족들에게 말한다. “지난 2년 동안 우리는 공포 속에 살았으나 이제부터는 희망을 품고 살게 되는거야” 여기에서 게슈타포는 인간이 겪는 고통을 상징한다. 고통을 앞에 놓고 기다릴 때는 두려움의 포로가 된다. 사람들이 자살하는 중요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게슈타포의 손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해방의 희망을 품고 살아가게 된다. 희망이란 고통 속에서 움틈을 말하는 것이다. 찬맛을 음미하고 저항을 감수해야 한다.

네트 없이 테니스를 치면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케이블카를 타는 것보다 비탈길이 있기에 등산의 의미가 있다. 인생이라는 나그네 길에 꼭 필요한 두 가지 장비가 있는데 하나는 희망이라는 지팡이고 다른 하나는 인내라는 신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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