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꽃소식과 인생 무상

2008-04-14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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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수(한민족포럼재단 사무국장)

아! 드디어 기다리던 꽃 소식이다. 그 누구 기다릴 사람 없는 이국 땅, 뉴욕에서 확실한 건 봄꽃 소식이기에 더욱 기다려 온 것일까.

그러나 부서지는 햇볕 속에서 성미 급한 여인들의 차림새를 보고 겨우내 움츠렸던 온 몸을 잠시 펴볼까 하면 다시 찬바람이 휘몰아치는 참으로 잔인한 4월이다. 그래서 옛 사람들은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봄이 와도 봄같지 않더라고 노래했던가. 그래도 대자연의 장엄함은 봄에 절정을 이루는 듯하다. 형형색색으로 산야를 물들이는 꽃만 봐도 그러하다. 활활 타오르는 그 모습은 마치 생명의 불꽃 같다. 그리하여 봄날의 들판과 산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화려한 한 폭의 그림을 보는 것 같다.


봄은 축복이자 환멸이다. 살아 있음의 눈부신 희열과 삶에 대한 비극적 인식에 새삼 눈뜨는 계절이다. 봄이 환할수록 청춘의 가슴앓이는 깊어진다. 발열(發熱)하듯 꽃 피고 어지럼증처럼 아지랑이 인다. 봄은 짓궂다. 그냥 앉아있지 말라고 일탈(逸脫)을 충동질 한다. “꽃 피어 봄 마음 이리 설레니 아! 이 젊음 어찌할거나(瑤草芳兮春思芬 蔣奈何兮是靑春)” 7세기 경 설요라는 신라 여승이 아름다운 봄날의 유혹을 견뎌내지 못하고 세속으로 돌아오며 남겼다는 ‘환속가(還俗歌)’가 봄빛 만큼이나 눈부시게 인간적이다. 그래서 누군가 봄을 환각의 계절이라 했던가.

어디 봄처럼 환각이 가능한 계절이 또 있을까. 바람 속에서 피어나는 잎과 꽃들, 화사한 햇살 뒤의 짙은 그늘, 밝고 높은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함께 봄은 항상 짧은 탄성으로 갑작스럽게 찾아와 익숙한 우리의 일상이 된다.하지만 순식간에 왔다가 떠나버리는 봄날처럼 우리네 삶의 과정도 영원하지가 않다. 기쁨과 영광, 견딜 수 없는 슬픔과 오욕의 순간도 어차피 지나가게 마련이다. 이 아름다운 계절이 속절없이 가버리기 전에 혹독한 겨울의 역경 속에서도 새 봄의 희망을 잃지 않았던 것을 꼭 기억해 두자.

모든 것이 회생하는 아늑한 봄날에 문득 ‘생명’과 ‘사랑’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본다. 생명이 있는 한, 그리고 우리의 가슴에 보석처럼 간직한 사랑이 있는 한, 고달픈 질곡(桎梏)의 삶 속에서도 희망이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아뿔사! 추억할 ‘사랑’ 한 점 가슴에 묻어두지 않고 있다면 이민살이는 참으로 가련했으려니, 이젠 그 ‘사랑’의 추억으로 삶의 향기를 피워내야 할 것 같구나.

창 밖으로 보이는 개나리가 자지러질 듯한 노란색을 발하고 있다. 이제 산과 들에는 어김없이 신비한 봄빛의 서정(抒情)이 감돈다.이렇게 해마다 어김없이 봄은 오고, 또 봄이 오면 새 생명이 움트고 꽃이 피게 마련이지만 한 고인은 봄에 피는 꽃을 바라보면서 무상(無常)한 우리의 인생과 비교하며 시를 읊었다.“명사십리 해당화야/꽃이 진다고 설워마라/명년 춘삼월 돌아오면/너는 다시 피련마는/우리네 인생 한 번 가면/다시 올 줄 모르더라/가지 마오 가지를 마오/불쌍한 영감아 가지를 마소” -

선산대사 ‘회심곡(回心曲)’날씨가 따뜻해지고 봄이 길어지면 개나리를 필두로 산과 들에는 꽃들이야 더욱 화려하게 자태를 뽐낼테지만 지금도 인생의 꽃을 피우지 못해 가슴 아픈 사람들은 어떻게 이 환상(幻想)의
봄날을 건널까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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