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주은혜’

2008-04-05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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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운기(뉴욕 임마누엘선교교회 목사)

‘주은혜’는 설교 제목이 아니다. 연전에 입양된 내 손녀딸 이름이다.
남달리 아기를 보면 죽고 못사는 내 딸 줄리에게는 아기가 없었다. 한 두 차례 현대 의술의 도움을 받으면서 출산을 시도했으나 번번이 유산으로 끝나자 남편의 동의를 얻어 입양하기로 마음을 굳힌 줄리는 늘 친딸처럼 보살펴 주는 시어머니를 모시고 서울에 있는 홀트 입양원을 찾은지가 벌써 한 해 하고도 반년이 지났다.

내가 ‘은혜’를 처음 본 것은 그 해 가을이었다. 그 때 생후 5개월 된 ‘은혜’는 비교적 침착하고 날카로우면서도 어딘가 주위를 경계하는 눈초리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세상에 나오자마자 어머니 품을 떠나서 이 사람 저 사람 낯선 사람들 품에 안겨야 했던 ‘은혜’! 그렇듯 남이었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이렇게도 친숙한 내 손녀딸 ‘은혜’가 되다니… 참으로 인간관계란 너무나 놀랍고 경탄스럽다. 자기가 몸소 낳은들 저토록 사랑스러울 수가 있을까, 할 정도로 ‘은혜’를 향한 줄리의 사랑은 깊어만 간다. 요새는 돌을 넘기고 아장아장 걷는 ‘은혜’가 어쩌다 얼굴을 찡긋만 해도 줄리는 온 몸에 경련이라도 일듯 즐겁고 귀엽고 예쁜가
보다.


주 서방은 한 술 더 뜬다. ‘은혜’가 정말로 기뻐하는 이는 엄마가 아니라 아빠이기 때문이다. 며칠 전에는 출근하려고 잠을 깨었는데 ‘은혜’가 아빠 배에 올라타고 자고 있더라는 말에 집안은 온통 웃음꽃을 피웠었다. 새벽이면 어디론가 말도 없이 사라지고 마는 아빠가 못 미더웠을 ‘은혜’의 얄궂은 계략이 분명했다.사실 ‘은혜’를 정말로 기르고 돌보고 수고하는 분들은 따로 있다. 바로 우리 사돈 내외이다. 두 분 다 몸도 성치 않은데다 슬하에는 어린 친손자, 외손녀들이 수두룩하다. 그런데도 ‘은
혜’가 나타난 후로는 모두 찬밥이 되고 말았다고 하니 사람이란 생산적 동물의 범주를 넘어서 관계적 동물임을 재삼 깨닫게 한다.

성경을 보면 교회시대 이전에는 이스라엘과 이방 열국을 종교적으로 철저히 구별하는 이방과 선민시대가 있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모든 만민을 사랑하는 포괄적인 구원 섭리가 있었지만 세상에 사랑을 전달하는 과정에서 이스라엘을 선민으로 구별했다.그것은 마치 모성애와 같은 것이었다. 갓난 아기에게 모성애가 정착되기까지는 적어도 10년이란 긴 세월이 있어야 한다고 한다. 그 기간 동안은 엄마가 한 아기에게만 자기의 사랑을 남김없이 부어야 비로소 모성애가 전달된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성경에 기록되는 ‘구약시대’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택하고 이방과 구별하고, 특별히 그들만을 축복하시고 사랑하였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아버지의 사랑에 감사할 줄 모르고 탕자처럼 아버지의 품을 떠나 세계의 고아가 되고 말았다. 외로움에 아버지는 외지에서 자식을 하나 취하여 양자로 삼고 그에게 사랑을 물같이 쏟는다. 그들이 바로 오늘의 그리스도 교회이며 우리 그리스도인들이다.성경 로마서 11장에 보면 우리 이방인들은 하나님도 없고 제사도 없는 돌감람나무였는데 하나
님이 선민인 참감람나무의 가지를 일부 찍어버리고 그 곳에 돌감람나무 가지인 우리를 접붙여서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받은 바 되게 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다.(로마서 11:17)이 얼마나 우리 이방인들에게 복된 일이겠는가. 남남이었던 ‘은혜’가 낯선 엄마 아빠를 만나서 세상에 둘도 없는 참으로 사랑하는 관계로 깊어지듯 우리도 이 놀라운 ‘주은혜’ 안에서 주님의 사랑을 만끽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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