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한 지붕 세 가족

2008-03-28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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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형(World OKTA 회장)

중학교 1학년 때로 기억된다. 국어선생님이 각자가 칠판에 자기 이름을 한자로 쓰고 그 뜻을 풀어보라고 하셨다. 자신있게 내 이름 석자 徐鎭亨을 한자로 쓰고는 ‘달성 서, 진압할 진, 형통할 형’이라고 큰 소리로 읽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천천할 서를 달성 서로 읽는 놈이 어디 있어” 하고 정정해 주셨다. 나는 그 때 얼마나 크게 난감함을 당한지 모른다. 4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낯이 뜨거운 것을 기억하는 것을 보면 그 날 나는 아주 큰 낭패를 당한 셈이다.

자기의 성씨가 중요하며 집안 성씨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스스로 버린다는 것을 미덕으로 알고 지내온 우리 조상들이 계셨기 때문에 우리는 한민족의 기개를, 긍지를 자랑스럽게 여기며 이곳 미국땅에서도 그 어려운 이민생활을 하면서도 각자를 지켜주는 지지대가 되어왔음을 부인 못한그런 우리들에게 주위를 가만히 살펴보면 자기 성씨를 너무나 가볍게 여기는 풍조가 있다. 아니 우리 사회에서 가장 강한 약속 중에 하나가 “내가 이것을 지키지 못하면 성을 간다 갈아”라고 장담을 하는 풍습에서 보듯이 성씨에 대한 긍지와 애착이 얼마나 큰 것인지 너무나 잘 안다.


그런데 우리가 태평양을 건너오면서 자기 성씨를 잘못 관리하여서 전혀 엉뚱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음을 보게 된다. 한 가족이 오손도손 한 지붕 아래에서 살아야 하는데 미국법으로는 완전히 다른 성씨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 사는 꼴이 되어 있다. 한 지붕 아래 세 가족이 모여 살고 있는 콩가루 집안인 셈이다.서 씨의 영문 표기를 Seo, Suh, So, Sir, Sur 등으로 여러가지 영문 철자로 표기한다. 결국에는 하나의 본을 가진 서씨가 아니라 미국에서는 여러 본을 가진 다양한 서씨를 양산한 셈이 된다.

아버지는 공무원이셨기에 중앙정부에서 준비해준 공무 여권에 담당 공무원이 외국어 표기 표준철자법에 의해 정해주는 영문 표기로 Seo 성씨가 결정되었으며 어머니 여권은 여행사가 급하게 만들어주는 바람에 또 다른 영문 표기 Suh 성씨로 여권을 만들었으며, 딸은 회사에서 급한 출장으로 인해 외국 초청회사가 보내준 초청장에 적힌 영문철자 대로 Suh 여권을 만들 수밖에 없었고, 아들은 군대에 가서 만드는 바람에 So로 여권을 만들었다. 결과적으로 한 가족 모두의 성씨가 각기 다른 영문 표기 성씨 여권들을 가지게 되었다. 더욱이 각자가 따로 미국에 오는 바람에 가족의 성씨를 정리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발음을 중심으로 알파벳으로 표기하는 영문 표기 성씨를 만들 때에 성씨에 대한 기본적인 기준이 없었던 덕분에 한 가족이 법적으로는 모두 남남으로 흩어지게 된 계기가 되었다. 여권을 관장하는 국가기관에 문의해 보더라도 자기가 원하는 영문 표기를 해오면 개성을 중시하여서 그대로 받아준다고 했다. 성씨가 아닌 개인 이름이야 각자가 개성에 알맞게 표현을 하고,영문 표기 또한 적절하게 표기함으로 개성있는 이름이 가능할 것으로 본다. 그러나 혈통과 족보를 중시해 온 한민족의 후예인 우리들이고 보면 가장 기준이 될 성씨가 각자에게 영문 표기의 자유를 주는 바람에 엄청난 혼돈을 가져왔다.

지금 이민 1세가 살아있을 때야 그나마 너는 달성 서씨, 학유공파 28대 손이라고 일러줄 수가 있다. 그러나 우리 애들이 한자는 커녕 한글도 정통하지 못하고 성장하는 것을 보노라면 가슴이 답답해진다. 얼마가 지나게 되면 사촌간이나 팔촌간에도 완전히 다른 성씨로 만나게 될 것이 자명하다. 혈통의 순수성을 보존하기 위해 친지간에는 혼인을 금지했던 미풍양속까지 무너질 것을 상상해 보면 지금이야말로 가장 시급하게 우리 동포사회에서 정리하고 넘어가야 하는 시급한 과제로 본다.한민족에 대한 형이상학적인 공리 공론에만 치우칠 것이 아니라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우리들의 성씨 영문 표기문제부터 바로잡아 두어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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