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유적 나들이

2008-04-01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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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태(시인)

구경거리로 남아있는 유적들은 그나마 다행이다. 처음부터 구경거리로 만든 유적은 아닌데 나라가 망하고 사회가 뒤바뀌면 새 나라 새 사회는 옛 것을 없애거나 한 구석에다 들어서 유적지 정도로 만들어 옆으로 치워놓는다. 그리고 보란듯이 새 것을 만든다. 역사의 진행은 언제나 새 것을 헌 것으로 만들고 헌 것을 유적으로 만든다. 한국에서도 마찬가지다. 황금문화로 찬란했다는 신라의 고궁이나 백제, 고구려, 심지어는 이씨조선의 전신인 고려의 궁궐도 찾아보기 힘든 한국에서 이씨조선이 만들어낸 궁궐 몇이 그나마 남아 구경거리로 전락한 서글픔을 품에 안고 서 있다. 누가 알았으랴! 구경거리로 전락할 줄을...

서울에서 고궁 나들이를 할 때면 고궁에서 일고 지고하던 선비들의 절개와 배반, 임금님의 인자한 얼굴과 노여운 눈매, 포도대장의 아첨과 호령소리가 신음소리로 변하여 들린다.지나고 나니 더 높아지고 더 잘 살아보겠다고 아우성을 치던 욕망은 다 부질없는 한 점의 바람이었고 남느니 구경거리 뿐인 그 시대의 유적 뿐이다.사람들은 왜 살까? 사람들은 왜 보이는 것마다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이 땅에서 살기 아니면 죽기로 몸부림을 칠까. 저승에는 이승보다 몇 천 배 더 좋다는 천국이 있고, 극락이 있는데 그 좋은 곳을 마음에 잘 담아 그쪽으로 가기를 염원하고 있으면서도 당장 그 좋은 천국이나 극락으로 가라면 왜 절레절레 손을 흔들면서 아무도 가지 않으려고 할까. 고행의 세상 길을 왜 끝까지 물고 늘어지며 하루라도 더 살려고 할까? 더구나 사람의 인생이란 유적이나 유물만도 못하여 몇 십년을 살고 나서도 남길 것이 거의 없는데 뭔가를 남기겠다고 쉬지 않고 꾸물거릴까?


그러다가 어느 날인가 떠나기 싫은 세상을 할 수 없이 떠나면 자식들의 몇 차례 울음소리를 끝으로 아무런 유물 없이 희미한 추억으로 잊혀지고 마는 것이 인생이 아닌가?그래서인지 조상들에게는 족보 외에는 관광거리가 없다. 내어놓을 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는데 그런데도 모두다 살다가 갔다. 산다는 그 노력이 얼마나 힘겨웠으며, 하루 하루의 고뇌가 얼마
나 많이 마음을 졸이게 했을까? 묘비에는 읽고 싶은 그런 내용은 하나도 없고 그저 이름 석자에 언제 왔다 언제 떠났다는 낯익은 숫자 뿐이다. 그걸 아는 어머니들은 자녀에게 평생 잊지 않고 가슴에 달고 갈 참교육을 위해서 끼니 때마다 밥을 해서 먹이고, 빨래 해서 깨끗하게 입히고 건강하게 키우느라 노심초사한다. 그리고 많은 것, 좋은 것, 힘이 되는 것을 배우도록 뒤에서 말없이 행실로 보여주며 지원한다.
그 중에서 잊을 수 없는 어떤 교훈이나 행실의 표본은 아이들에게 있어서 구경거리의 유적이 아니라 기치 있는 유물이 된다는 것을 아버지는 몰라도 어머니는 안다. 세상을 밝고 유익하게 키운 힘은 어머니들이었다. 아버지들이 만든 고궁은 세월 지나 한낱 구경거리로 전락을 했지만 어머니들이 키운 한석봉의 글씨라든가, 신라를 지키고 삼국을 통일한 김유신 장군의 어머니인 지증왕의 외손녀 만명(萬明)씨, 사임당 신씨가 키운 이율곡의 학문, 임진왜란에서 나라를 구하도록 강건하게 이순신 장군을 키운 이순신 장군의 어머니 변씨, 삼천지교(三遷之敎)로서 맹자를 선한 쪽을 바라보게 키워 성선설을 내세우게끔 한 맹자의 어머니, 이름 있는 교사가 되길 원하여 자기 직업에만 최선을다하는 아버지에 반하여 기독교의 신앙이 무엇인가를 말없이 가르쳐 주고 일상 생활에서 신앙의 행동을 보여주어 대 신학자 어거스틴을 일깨웠던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 감리교 교단을 새로운 신학으로 세운 웨슬리의 어머니 수잔나 등의 교육은 보석보
다도 값진 유산으로 역사 속에 남아 흐른다.

유적은 구경거리에 지나지 않지만 유산은 대대손손 언제나 원자재로서 쓰임새를 기다리고 있다.스파르타의 어머니들은 전쟁터로 나가는 자식을 앞에 세우고 가르친다. “만약 싸움터에서 적을 향한 칼이 짧거든 한 발자국만 앞으로 더 나아가 싸워라”유적을 만든 사람들은 남자들이지만 역사적 유산이나 유물을 만든 사람들의 뒤안길에는 어머니라는 여자들이 있었다. 이민의 역사 속에서도 아버지들이 아니라 어머니들의 교육과 영향력은
지금도 활동하고 있을 것이다.교육하기에 자식이 멀다고 느껴질 때마다 자식 앞으로 한 발자국씩 더 가까이 다가가며 노력하는 어머니들, 참고 견디는 힘이 크고 참사랑으로 이루어진 존재가 어머니라는 이름이기 때문이
다. 구경거리의 유적이 아니라 유산이나 유물은 그래서 생기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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