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어떤 목회자에 대한 논의

2008-03-22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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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준영(공인회계사)

우리는 지나는 일생을 열심히 살고 그 열심으로 무엇인가를 이루고, 그래서 거기서 보람과 삶의 의미를 느끼고 힘을 얻어 남은 인생길을 또 열심히 걸어간다.그러나 누구나 잘못된 길을 들어갈 때가 있다. 그리고 그 곳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한다. 그 노력하는 모습이 아름다울 수 있고, 또 그로 인해 새로운 창조가 이루어지기도 한다.

기독교인들은 궁극적으로 그 힘을 하나님에게서 얻는다.논의 대상인 목사는 1년여 전에 세상의 기독교인들의 얼굴을 뜨겁게 하는 간음사건이 드러나 잠시 종적을 감추었다. 그를 그가 속한 단체에서 다시 논의한다고 한다.자신을 스스로 용서함이, 또한 그 용서한다는 말로 인해 우리가 속한 사회와 기독교인, 자녀들에, 그리고 모든 성도들이 경배하는 하나님께 미치는 영향을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죄지은 자, 당사자를 포함해 누구도 하나님을 대신해 그 종을 용서할 권리는 없다. 하나님은 죄인까지 구별없이 사랑하신다. 그러나 그 사랑은 율법의 그물을 통과해서 불순물을 제거시켜야만 온전히 드러날 수 있다.


인간 스스로의 생각과 의에서 비롯된 사랑은 맹신이고 율법보다 더 단단한 고집일 수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위에 올라서는 교만일 수도 있다.
목사님은 하나님의 대리인이 아니다. 성령님의 인도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연하는 이들이다. 그들이 하나님의 뜻까지 결정하는 결정권자들은 아니다. 용서와 심판은 하나님이 직접 세월속에서 사람들을 통해서 하신다. 하나님의 용서는 세월 속에서 경험되어지는 것일 때가 많다. 자칫 섣부른 스스로의 용서는 많은 이들에게 상처를 주고, 혹은 죄의식을 무디게 할 수도 있다. 죄 자체를 경시, 나아가서 무시하게도 만든다. 그로 인해 하나님의 영광도 가린다.

최소한 무엇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지는 않더라도 더 이상 가리지 않을 것인지는 목사들 스스로가 더 잘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스스로의 사랑을 강조할 때 하나님의 존엄과 위엄을, 법을 스스로 무시하게 되는 인간의 오만이 드러나게 된다. 우리는 당사자인 목사까지 포함해서 감히 용서한다는 말을 삼가야 하지 않을까? 밧세바를 범한 다윗을 하나님이 용서하셨듯이 하나님의 용서를 믿는다.하지만 댓가를 치루어야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법이다. 인간이 결코 치를 수 없는 구원의 댓가는 그 분의 아들로 대신 치루어 주셨지만 영원한 삶을 주신 분에게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죄의 댓가를 달게 치루어야 한다. 우리가 수치이던, 고통이던, 그 댓가를 달게 치른 후에 하나님은 다시 새 길을 주신다. 다윗도 그 죄로 인해 아들의 칼을 받아야 하였고, 그 칼로 아들을 쳐야만 하는 댓가를 치렀다. 진정한 회개를 하나님 앞에 드린 이는 어떠한 댓가도 달게 받는다.

인간적으로 그를 사랑하고 아직도 존경하는 이들의 사랑도 당사자와 그 소속 단체는 승화시킬 책임이 있다. 또한 형식적인 인간의 판단과 정죄를 벗어난다 하여도 결코 그 길이 온전할 수 있는 길이 아님도 그를 사랑하는 이들도 알아야 하지 않을까 한다.죄진 자는 인간의 위로와 이해 속에서, 스스로의 이해와 용서를 통해 위로를 받아야 하는 것이 아니다. 가슴을 찢고 옷을 찢는 하나님 앞에서의 회개를 통해 하나님의 위로를 구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은 기쁨과 평강 속에서 다시 길을 인도하실 것이다.하나님의 종이라 불리는 목회자들은 평신도와 같은 기준을 가지면 안되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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