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전화 공해

2007-12-19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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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중돈(법정통역)

나는 일찍부터 전화에 오래 매달려 있는 사람을 무척 싫어했다. 특히 내가 학교를 졸업하고 첫 직장을 얻은 곳이 외국 항공사의 예약 통제 데스크였는데 걸려오는 전화가 쉴새 없이 울리는 곳이어서 간단명료한 전화 요령이 필수적인 자리였다. 그래서 전화는 꼭 필요한 용건만으로 끝을 내는 것이 몸에 배인 모양이다.나는 한 두시간씩을 전화에 매달려 있는 사람을 보면 미워하다가도 오히려 존경심이 생길 때도 있다. 도무지 무슨 화제가 그리 풍부해서 그토록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기고 필경 무슨 특별한 재주를 가진 사람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 긴 통화의 내용을 들어보면 대개 아무 것도 아닌 잡담이거나 거의가 머리가 좀 시원찮은 사람들의 나쁜 습관이란 것을 알게 된다. 요령이 없어 했던 말을 계속 되풀이하던가, 표현이 분명하지 않아 지름길을 두고도 몇 바퀴 바깥으로 빙빙 돌아다닌 다음에야 감이 잡히는 요령부득의 대화 때문이다.하긴 그 중에는 세상만사 이야기를 끝도 없이 지껄일 수 있는 무진장한 화제를 가진 초능력자도 있다. 사람들 중에 특별히 이런 긴 통화 버릇을 가진 부류들을 볼 수 있는데 이 부류의 사람들이 속한 사회의 한 문화적 특성이 아닌가 싶다.


내가 일하는 직장에는 중남미 출신 스패니시들이 절대적인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이들 중에 이같이 전화에 매달려 하루를 보낼 수 있는 초능력자들이 많다. 아마 스패니시의 문화적 특성인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여성들이 남성보다는 통화가 길다. 그것은 남성의 경우 하루에 평균 7,000 단어를 말하는데 비해 여성들은 무려 2만 단어를 말한다는 통계 수치가 있다니 당연한 결과인 것 같다.내 직장은 스패니시와 여성들이 대다수이다 보니 이들의 전화 통화 때문에 말썽이 이만 저만이 아니다. 다섯 평 정도 넓이 밖에 안되는 좁은 방에서 이들 몇몇이 전화를 들고 있으면 이는 짜증스럽기 그지없는 극심한 공해가 된다. 또 중국여성 몇몇이 끼어있는데 중국인들의 큰 목소리도 또한 수준급이다.

우리의 사무실이란 법정에서 필요한 통역관의 요청이 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는 대기실인 셈이다. 그런데 이들 전화 마니아들은 법정에서 요청이 있어도 하던 통화를 끝내고 가느라고 늘 지각하게 마련이었고 드디어는 법원에서는 큰 문제거리로 되고 말았다. 법원 사무처에서 결국 우리 방에 설치되어 있던 외부용 전화를 아예 없애버렸다.바깥으로 전화를 걸 수 없게 되자 몸살이 난 이들은 어느 날 사무실 한 구석에 또 다른 전화용 ‘젝’이 설치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고 누군가가 전화기를 가져와서 비공식 전화를 설치했다. 이 전화는 전에 없애버린 전화와 달리 시외전화까지 가능해서 이제는 이들 전화 광들이 매달려 있는 시간이 더 길어지게 되었고 전화는 잠시 쉬는 틈이 없을 정도가 되었다.

이러니 좁은 사무실에서 떠드는 전화소리는 마치 페르시아 시장을 방불하게 하는 난장판이 되었다.화가 치밀어 무슨 조치를 취하고 싶었지만 차마 사무국에 불법전화를 설치했다고 일러바칠 수도 없는 일이어서 제발 이 놈의 전화가 고장이라도 났으면 하고 있던 참이었다. 하루는 남달리 일찍 출근한 날이 있었다. 나를 괴롭히는 전화가 눈에 띄었다. 이 전화 때문에 내 휴식을 다 망쳤다고 생각하니 분통이 치밀어 이 전화 젝을 쥐어박아 버렸다. 그러자 어찌된 영문인지 전화가 죽어버렸다.

궁하면 통하는 길이 있다고 했던가? 기이한 일이다. 본래가 공식적으로 연결해 준 것이 아닌 도둑 전화였으므로 고장신고를 할 수도 없고 아마 사무국에서 이를 발견하고 통화를 끊은 모양이라며 시치미를 떼고 있었다.
며칠간의 평화가 찾아오긴 했는데 이놈의 휴대용 셀폰이 이제 난리를 치기 시작했다. 드디어 상부의 지시가 내려왔다. 사무실에서는 일체 휴대전화를 사용하지 못한다는 금지명령이 내려왔다.이래서 나는 드디어 조용한 사무실에서 휴식을 되찾을 수 있게 되었고 젝을 쥐어박아 공해를 해결한 기분에 싱글벙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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