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산불로 벌거숭이가 된 산

2007-12-05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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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자(의사)

지난 10월, 올케가 뉴욕에서 캘리포니아 샌디에고로 이주를 하였다. 이사한 새 집에 이삿짐을 풀기도 전에 대형 산불로 대피하는 혼비백산의 소동이 일어났다.큰 딸이 샌디에고 의과대학에 교수로 취임해서 뉴욕을 떠나 그 곳에 새 둥지를 틀었다. 새로운 삶에 도전하는 성취욕이 강한 30대 중반의 싱글 알파 걸인 딸을 따라 올케는 수십 년 전 이민의 첫 발을 디디고 뿌리를 내렸던 뉴욕을 떠나 샌디에고로 이사를 한 것이다. 그런데 산불이라는 화마의 불길이 기다리고 있을 줄 상상이나 했겠는가?

지난 10월에 일어난 남부 캘리포니아 지역의 산불은 역사상 초유의 광풍이 산천초목을 강타하면서 건조한 초목에 불이 붙고, 잇달아 누전으로 고압선끼리 마찰되어 기름을 쏟아 부은 듯 불길은 건물과 나무, 야산을 집어 삼켜버리고 말았다.올케가 새로 산 집의 지역이 통제구역으로 집을 떠나 대피해 있는 동안은 소름 끼치는 악몽같은 순간들이었다. 온 몸을 던져 눈물과 땀으로 이룩한 이민의 삶의 뿌리를 송두리째 잃을 뻔 하였다.
다행히 두 싱글 모녀가 새 둥지를 튼 집은 화마의 불길이 피해가서 놀란 가슴을 쓸어 내렸다. 대피했다가 집에 돌아오니 모래와 재가 집안에 쌓이고 강풍으로 나무도 쓰러져 있고 수영장은 잿더미로 메워져 있었다고 한다.서부로 여행 중이던 내가 그 넓고 아름다운 집에 들렸을 때는 잿더미들을 말끔히 청소한 후였다.


마침 감사절로 미국 주류사회의 넓은 바다로 진입한 눈부신 주역들이 집안 속속들이 모여들었다. 칠면조와 펌킨 파이 굽는 냄새, 그릇 부딪치는 소리, 옥수수 스프 냄새, 웃음소리가 집안을 가득히 메운다. 훈훈한 이야기의 꽃을 피우며 무서운 화마의 발톱이 할퀴고 간 상처를 말끔히 씻어내고 있었다.나는 이 집 주인인 올케와 장미꽃이 가득히 핀 뒷마당에 앉아 와인을 마시며 정면으로 맞은편에 바라보이는 산을 보았다. 거대하게 버티고 있던 산은 산불로 숯덩이처럼 새까맣게 타버렸다. 산의 정상 꼭대기에 자리잡고 있는 대저택은 팝의 황제였던 마이클 잭슨의 여동생인 가수 자넷 잭슨의 별장이라고 한다. 주위의 집들은 이번 산불로 모두 흔적도 없이 타버리고 그녀의 집 한 채만이 덩그렇게 남아 있다.

거짓말처럼 사라진 집터는 화상을 입은 흉터의 반점처럼 남아 있다.
그녀는 2004년 미국 전역으로 생중계된 북미 미식축구 수퍼보울 하프타임 쇼에서 격렬하게 공연하던 남자가수인 팀버레이크가 갑자기 자넷의 상의를 찢어 벗기는 바람에 수백만의 시청자들 앞에 가슴을 적나라하게 노출하는 소동이 일어났다. 이 방송 후 시청자들과 언론은 그녀에게 혹독한 비난을 쏟아 부었다.산 꼭대기에 한 채만 남아있는 그녀의 저택 주위는 붉은 흙덩어리를 쌓아놓은 사막의 언덕처럼 메마르고 삭막하다. 산 꼭대기에 산을 허물어 길을 내고 대기를 정화시키고 맑은 산소를 뿜어내는 나무들을 마구 베어내고 궁궐같은 별장을 지어놓았다. 곤충에서부터 동물과 식물 등 함께 살아가는 생명체의 공존의 생태계인 자연을 파괴하는 것은 인류가 저지르는 횡포이다.

그녀는 일년이면 몇 번이나 이 별장을 다녀갈까? 아니 이 별장은 그녀가 소유하고 있는 여러 채의 집 가운데 한 채일 뿐이다. 산을 덮고 있던 나무와 숲속에서 지저귀는 맑은 새 소리, 야생화, 들꽃 향기 등 자연의 속삭임
이 모두 사라졌다. 정체성을 잃고 나그네처럼 살아가는 이민자들에게는 새로 정착한 곳 샌디에고가 아무리 환상적인 도시라 해도 낯설고 물설은 땅이 아닌가.삶의 뿌리를 다른 토양에 이식한 올케는 마주 바라보이는 산불로 벌거숭이가 된 산을 바라보며 한동안 살아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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