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낙엽은 지는데

2007-12-01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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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철(목사.수필가)

올 겨울은 기온이 예년에 비해 좀 높기 때문에 아직은 겨울이 아닌가보다 생각하며 무심코 달력을 보니 소설(小雪)이 며칠 전에 지나가 버렸다. 절기가 되어도 기온이 높은 탓에 눈 없는 소설이 지나간 것이다.
요 며칠 사이에 나뭇잎 색깔이 갑작스레 가랑잎처럼 되더니 낙엽지는 소리가 요란스럽다. 이제 가을인가 했더니 어느새 겨울이 성큼 다가 선 것이다.

옛날 영국인들은 일년을 여름과 겨울 두 계절로만 나누었다. 가을(Autumn)이란 말이 생겨난 것은 14세기 초서(Chaucer Geoffrey, 영국 시인 1340~1400)의 시대부터였다. 그 후 가을을 다시 ‘수확의 계절’(Harvest), ‘낙조의 계절(Fall)’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요즘 하루가 다르게 나무들은 낙엽을 떨구기에 매우 분주한 것 같다. 월동준비를 하는 것이다. 여름 내내 푸르고 무성했던 잎사귀들을 그대로 가지고서는 겨울 동안에 살아남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여름철에 뜨겁게 작렬하는 햇볕을 한껏 받아들이고 땅 속의 진액을 충분히 빨아올려 저장함으로써 겨울 양식을 저축한 후 이제는 그 무성했던 잎사귀들을 고갈시켜 떨구기에 바쁜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삶의 지혜인 것이다.무난히 겨울을 나자면 이 자연의 이치를 우리는 자연에게서 다소곳이 배워야 할 것이다. 따스함도, 흥겨움도, 안락함도, 햇빛도, 벌나비도, 꽃과 과실도, 그리고 새도, 아무 것도 없는... 낙조의 계절을 맞이한 것이다. 우리가 잠들고 있는 밤 사이에도 낙엽은 쉬임 없이 떨어진다. 낙엽이
다 떨어지고 앙상해진 알몸의 나뭇가지에 서리가 맺히고 눈이 쌓이고 얼음이 얼어 고드름이 매어달리겠지. 사람들은 북풍한설에 나무들이 다 얼어 죽을까 염려하겠지만 잎사귀를 말끔히 떨구고 난 나무는 절대 죽지 않는다.

영국 시인들은 하나같이 겨울을 어두운 계절(Dark Days)이라고 말한다.셸리의 유명한 ‘북풍부(北風賦)’에도, 워즈워드의 시에도, 세익스피어의 ‘소네트’에도 한결같이 겨울을 ‘Dark Days’라고 표현하고 있다. 하긴 사흘 굶은 시어머니의 얼굴처럼 음산한 겨울은 사뭇 회색의 계절이고 보면 영고성쇠(榮枯盛衰)가 무상한 천시(天時)를 생각하게 된다. 욕심 같아서는 언제나 상춘(常春)의 절기를 누리고 싶은 것이 인지 상정이 아니겠는가? 춥지도 더웁지도 않은 기후는 여간 안온한 느낌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봄인가 하면 어느새 햇볕은 따가와지고, 또 가을인가 하면 절후는 금새 겨울을 알리는 경종을 울린다.

그러나 4계절의 변화는 견디기 어려운 것만이 아닐 뿐 아니라 또 한편으로는 유익한 면이 있다고 본다. 대체적으로 동양인의 머리가 멍청한 남양인이나 서구인의 그것보다 명석한 것은 추운 겨울과 같은 계절이 있어서 우리의 정신을 시시때때로 자극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덥지도 춥지도 않은 늦은 봄날에는 노곤한 상태에서 정신이 흐리멍덩해 지지만, 살을 에는 듯한 추위 속에서는 정신이 버쩍 들게 마련인 것이다. 쨍하게 맑고 차가운 겨울날에는 머리 속도 수정처럼 맑고 깨끗해지는 느낌이 든다.

‘다크 데이’라는 그 어두움은 그냥 어둡기만 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심신을 쉬게 하는 휴식의 여유와 내일을 향한 명상의 기회이기도 한 것이다.
겨울은 웅크리고 으스스하게만 느끼는 사람에게는 추운 계절이지만, 내일의 약동을 위한 의지의 마음 가짐으로 맞는 사람에게는 봄의 일보 전이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다크 데이’를 노래한 셸리도 “겨울이 오면 봄이 어찌 멀었으리오”(If winter comes, can spring be far behind?)라고 긍정적인 끝맺음을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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