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국경과 문화적 코드

2007-11-29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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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중돈(법정통역)

나는 60년대 초에 난생 처음으로 해외여행의 기회가 있어 홍콩을 방문하게 되었을 때 내가 도착하자 말자 안내를 맡은 친지에게 중공과의 국경지역에 가서 경비 서고 있는 그 무시무시한 중공군을 먼 발치에서라도 보러 가자고 해서 사람들을 놀라게 한 일이 생각난다. 나에게는 중공군의 구경이 다른 어떤 관광지 보다 스릴있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70년대 말에 아직 냉전이 한창일 때 나는 관광버스 편으로 알프스 산을 넘은 일이 있다. 오스트리아와 이태리가 접경해 있는 한 산록마을 국경에서 월경 수속 때문에 버스가 멈추고 있을 때였다. 말이 국경이지 아무런 담벼락이나 철조망이 설치된 것도 없이 산촌 마을을 지나는 도로 가운데에 색이 다른 벽돌로 한 줄이 그어져 있고 양쪽에 관리 한 두명이 지나가는 관광객들의 여권이나 한가로이 확인하는 것이 전부였다. 경비가 어마어마하고 무시무시한 무장 군인이 경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는 인식이 머리에 박혀있던 나로서는 참으로 기이한 생각이 들어 어리둥절하고 있던 때였다.
이러고 시간을 보내고 있는 참인데 일곱 여덟 살 쯤 되어보이는 두 소년이 국경선으로 그어놓은 줄을 네트 삼아 공놀이를 하고 있는 광경을 보게 되었다. 이 광경은 내 일생을 통해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남아있는 충격적인 사건이다.


중무장한 군인들의 총을 맞대고 있어야 할 국경선에 한 소년은 오스트리아에서 또 한 소년은 이태리에서 공을 쳐 넘기는 놀이를 하고 있는 광경은 나에게는 상상하기 어려운 충격이었고 조국이 처해있는 무시무시한 국경을 슬퍼해야만 했다.그 때는 내가 항공회사에서 일할 때였다. 유럽에 있는 지사에서 가끔 서울에서 평양으로 가는 교통편을 알려달라는 전보를 받아볼 때에도 그들이 생각하고 있는 국경에 관한 다른 인식에 놀라곤 했었다.이렇듯이 국경이란 곳에 따라 천양지차로 인식이 다르고 그에 따른 많은 차이가 생기기 마련이다. 국경 통과의 어려움의 정도에 따라서 그 교통과 통신이 제한되게 될 것이고, 이렇다 보면 양편에 있는 사람들의 문화 발전에 차이가 생기고 다른 문화의 코드가 발달하게 마련일 것이다.

냉전체제가 무너지고 옛 공산진영에 살던 많은 사람들이 미국으로 와서 살고 있다. 어느 나라이건 각기 그 문화의 특성이 있게 마련이지만 특히 이들 공산진영 출신들로부터 느끼는 특수한 사고방식이랄까, 또는 문화적 코드는 아주 유별한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들은 공산독재 체제 밑에서 사유재산의 인식이 없이 집단 생산공장이나 농장에서 일해 온 경험에서 길러진 나름대로의 문화 코드 때문일 것이다.
직장의 동료들 중에 옛 소련이나 유고슬라비아, 폴란드 등 공산국 출신들이 있다. 이들의 공통되는 특성 중에 하나는 우리 자본주의 사회의 관점에서 보면 언제나 게을러서 감독이 없이는 자발적으로 일하지 않는 습성이 있다. 주어진 임무를 처리하는 데에도 그냥 시간만 때우면 된다는 인식이고 능동적으로 일을 처리하는 법은 구경하기 힘들다. 그리고 이들은 공짜로 제공되는 것이라면 어떤 것이던 절대로 거절하는 법이 없다.

이들의 이런 습성 때문에 직장에서 언제나 말썽이 나고 따돌림을 당하고 있다.이런 현상은 당연히 그들이 자란 사회환경 때문에 생긴 문화의 코드 때문이라 믿어진다. 그러니 외부와의 단절 상태에서 그리고 사유재산의 인식이 없지 집단 노동에만 길들여진 북한인민들의 문화적 코드는 어떨 것인지 통일을 두고 생각해 보면 아찔한 생각이 든다.이미 탈북한 동포들에 관해서 비슷한 비난이 들려오고 있다. 통일에 대비해 이들의 문화 코드를 선도할 우리쪽의 준비가 필요한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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