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영어를 잘 한다는 것

2007-11-28 (수)
크게 작게
전관성(자유기고가)

세상을 살다 보면 참으로 가소로운 일을 많이 보게 된다. 작금 한국의 많은 병폐 중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고 나라가 흔들릴 정도로 가정이 파괴되고 있는 현상인데도 속수무책인 ‘기러기 아빠’ 문제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1950년대부터 1960년대 말까지만 해도 영어를 하는 젊은이들은 외국인 회사는 물론이려니와 국내 무역회사를 비롯해 대형 종합상사에서까지 취업조건으로 우대를 받았던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런데 어느 때인가부터 입시문제가 대두되고 취업 경쟁이 극심해지면서 유학 바람이 일기 시작했고 이제는 초등학교 학생 나이의 어린 자녀들까지 해외로 나가면서 기러기 가족들이 탄생되었고 국내에 남은 아빠의 신세는 치유하기 힘든 우울증과 정신질환을 유발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한 마디로 얘기해서 기러기 가족들이 겪는 고통과 조기유학의 병폐는 학벌주의와 학력 위주의 기초한 우리 사회의 저변에 깔려있는 고질적인 잘못된 인식 때문이다. 작년 어느 섬의 두 여학생이 독학으로 하버드와 MIT 공대의 조긱 입학허가를 받은 쾌거의 낭보가 있었다. 가난한 어촌의 가정에서 오로지 자습과 복습을 통해 학교수업에 충실하면서 영어공부도 순전히 독학으로 이루어낸 실력으로 세계 명문대학의 입학허가서를 거머쥔 것이었다.

현재 미국에서 유학생으로공부하고 있는 한국인 학생 수가 곧 10만을 돌파한다는 통계이다. 조기유학생만 따진다 해도 계속 증가추세에 있는 우리나라의 경우 매년 1만명 이상의 기러기 아빠들이 탄생한다는 것이고 중고등학생에다 대학생에 이르는 숫자를 가산한다면 정말 놀랄 정도가 된다. 이러한 증가 추세를 굳이 따지지 않는다 해도 한국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우리의 고귀한 한글, 한국어를 놔두고 일상에서마저 영어를 섞어 사용할 정도가 된 현실에서 이제 영어를 잘 함으로서 제 2외국어를 구사한다는 것은 그런 어학능력을 갖춘 사람들의 숫자가 넘치고 너무 많다 보니 현실에서 필요로 하는 희소가치가 바닥에 떨어졌다는 것이다.

얼마 전 어느 단체에서 있었던 일이다. 부모를 따라 미국에 이민온 사십대 초반의 한 젊은이의 얘기다. 미국에서 중고등학교를 거쳐 이름을 제대로 밝히지 않는 대학을 어영부영 나온 주제에 뚜렷한 전공분야도 모르겠고 현재는 하는 일이란게 단순노동으로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소형 서비스업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이다. 물론 미국에서 학부를 나왔다고 누구나 다 미 주류사회에 화려하게 진출한다는 기대를 하는 것은 무리이다. 그러나 이런 정도의 사람이 이민 1세대인 노령의 존경받는 회원들 앞에서 영어를
잘 한다는 걸 과시라도 하듯 거들먹거리는 메스꺼운 꼴로 좌중을 무시하고 좌충우돌하는 작태를 벌인 일이 있었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다.

더군다나 대상자가 한국에서부터 이곳 미국에서의 경력까지 계산한다면 현재 몸을 담고 있는 분야에서만 20여년 이상 전문인으로 종사하고 있는 사람들 앞에서 얘기이니 하는 말이다. 한국의 명문대학과 대학원을 거쳐 미국에서 공부까지 한 전문인 앞에서 벌어진 일이다.말을 바로 하자면, 미국에서 초등학교만 나와도 영어는 개나 걸이나 잘 할 수밖에 없는 것 아
닌가! 그야말로 학교 문 근처에 갈 형편이 안되었던 일자 무식쟁이라 할지라도 미국에서 자랐다면 영어는 한국에서 명문대학을 나온 유능한 인재보다 영어 구사를 잘 할 수 있는게 아닌가 하는 말이다.

나라 안팎이 온통 영어, 영어를 안 쓰면 뭐가 잘못된 것처럼 돼버린 우리나라 사람들의 의식과 수준이 문제이지 않을 수 없다. 회사 이름에서부터 동네 작은 수퍼까지도 영어로 간판을 달지 않으면 장사가 안되는 나라, 국민 모두가 시청하는 드라마에서도 영어로 지껄이는 장면을 버젓하게 감독, 연출하고 또이런 걸 그냥 보고 넘어가는 국민 정서 하며 또 이걸 좋다고 보면서 감동하는 나라이다.영어를 사용하고 잘 한다는게 잘못된 것은 아니다. 어디 영어 뿐만이랴! 일어, 중국어, 불어 그리고 스페인어를 비롯한 모든 외국어를 포함해서 이중, 삼중언어 구사를 하는 것이야말로 일상에서든 전문분야에서든 필요하고 유익한 일임을 장려하고 독려해야 마땅한 일이다.

그러나, 우선 사람이 되는 인성교육도 중요하지 않을까 해서 하는 말이다. 인간성, 즉 심성과 인성과 도덕성이 결여된 자가 어찌 출세하기를 바랄 수 있으며 나아가 큰 일을 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앞서서 하는 얘기이다.

2007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도리스 레싱(Doris Lessing)의 공식 학력은 14살 되던 해의 중학교 중퇴가 전부이다. 그런 사람이 영어를 잘 하고 영어로 소설을 썼다. 차제에 그 분의 영어 실력이 어떤 수준인가 하는 것은 한번쯤 되새겨 볼만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앞 뒤 분간을 못하고 텅 비어있는 머리에다 빈 수레가 요란하다는 우리나라의 격언도 모르는 온통 ‘무엇’만으로 가득 찬 향기가 나지 않는 사람으로 주위에 눈쌀을 찌푸리는 냄새 풍기는 행태는 삼가는 걸 배워야 되지 않을까?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