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하늘 가는 밝은 길

2007-11-21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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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태(시인)

“하늘 가는 밝은 길이 내 앞에 있으니…” 개신교 찬송가 545장의 첫 구절이다.이승살이 험한 길에 닳고 닳은 헌 신발을 벗어버리고 새 신발 갈아 신고 저승길을 나서면 하늘 가는 그 길은 정말로 밝으며 발걸음도 사뿐사뿐 가벼울까? 그러기를 바랬다.

임종을 향해 가시는 92세의 아버지 얼굴을 보고 있노라니 세상살이라는 것이 어둡고 침침한 골짜기를 지나는 무거운 발걸음의 노역이라고 새삼 느껴졌기에 세상살이 누더기 옷 벗어던지는 날은 밝은 길로 나서는 아버지의 새 날이 되기를 바란다.“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를 편히 쉬게 하리라” 천주께서 그리 말씀을 하셨으니 아버지의 새 삶이 그리 되기를 바랬다.사람들은 내 아버지께서 세상을 사신 햇수가 92년이 넘으시어 장수하시었다고 말들을 하지만 구십 년이 아니라 구 백년을 살았더라도 지나고 나면 다 짧은 것이 인생의 길이다. 인생은 짧다. 짧아서 더 서럽다. 자식들의 효심이란 언제나 내일, 내일로 미루다가 한 두번의 통곡으로 끝을 내고 다 잊어버리는 일이라기에 나는 서럽다. 나 또한 그럴 것이 아닌가!


노년의 소망은 내세에 대한 희망인데 내 아버지께서는 그런 것도 없으시었다. 내 어머니인 당신의 아내를 1984년 12월 25일 하늘나라로 먼저 보낸 후 어른이랍시고 아무도 모르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얼마나 그리워하셨는지 공주 계룡산 초입 선산에 누워계신 내 어머니인 당신 아내 옆으로 가고 싶다고 작은 목소리로 자주 자주 말씀하셨다. 유언이었던 평소의 그 말씀, 내세에 대한 소망보다도 몸서리가 솟구치는 뉴욕의 외로움을 털어내고 싶었던 간절한 소망이었다.

1985년 1월 1일 새벽 4시,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꼭 한 주일 후, 플러싱에서 33살의 나이로 세상을 뜬 내 동생의 유골단지를 들고 아버지가 한국으로 떠나시던 날, 케네디 공항에서 어쩌다가 무심코 엿본 아버지의 지갑 속의 어머니 사진, 그 때 나는 새삼스럽게 아버지의 얼굴을 쳐다보고 끓어오르는 연민의 정을 두 손으로 꽉 잡고 있었다.아버지란 이름의 존재는 사랑이며, 그리움이며, 솟구치는 열망 같은 것이 없는 줄만 알았다. 그저 식솔들이나 걱정하고 벌어다 먹이고 공부 시키고, 출가시키고, 그리고 일만 하는 강인 줄 알았다. 아버지는 편안한 마음을 가지고 여유있게 놀거나 여행도 모르는 줄 알았다.

절반쯤의 정신을 이미 먼저 떠나보낸 듯한 그런 아버지의 표정에서 나는 무엇을 꺼내고 있었을까? 세상 일이 아무리 북적거려도 별 볼일 없으면 관심이 없는 것이고 싫으면 떠나는 것이 인심인데 사랑하는 아내가 멀리 있으니 아내 곁으로 떠나고 싶었을 것이고, 아무리 자식이 많아도 노년의 외로움을 무겁게 등에 진 일상의 생활에 지치고 지쳤을 것이다.
차가운 북극의 하늘에서 가지도 못하고 오지도 못하고, 아름다운 빛으로 지구의 차디찬 머리를 비껴가는 오로라, 아마도 그것이 내 마음 속에 맴도는 아버지 모습인지도 모른다.

왜정 치하 공주에서 태어나 개성 송도고보를 졸업할 때, 담임선생님의 주선으로 징용을 피해 만주 철도국 직원으로 취업을 한 후 한달, 한달 생활비도 되지 않던 적은 품삯을 월급이라고 받으면서 평생을 가난한 철도 공무원으로 지내시다가 청량리역 열차사무소 소장직을 끝으로 정년퇴직을 맞은 아버지. 그 때부터 아버지 시야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씩 하나씩 아버지 곁을 떠나기 시작하였다. 아버지의 말 수도 하루가 다르게 줄어들었다.

6.25 한국전쟁이 터지자 군 수송을 맡았던 죄로 산속을 헤매며 북한군을 피해 다니다가 운좋게 살아남은 아버지의 이야기는 철이 없어서였는지 나는 쓰라림보다는 스릴 섞인 재미있는 줄거리로 간직하고 있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이리 밀리고 저리 밀려 준급행 열차도 서지 않는 시골역 역장으로 좌천을 당하면서도 별 뾰족한 재주가 없어 그 때마다 가라는 데로 보따리를 챙겨 길을 나섰던 아버지, 이번에도 승진길을 가시는지 아니면 좌천길을 가시는지 가족들을 다 두고 보따리 한 점 없이 이승에서 또 어디로 가시려 한다.무엇이 그리 급하셨는지 의식의 절반쯤은 벌써 하늘로 보내놓고도 두고 가는 자식 걱정, 그리웠던 어머니나 힘들여 거쳐가며 만들었던 인생의 추억, 아니면 먼 길 여정의 설레는 기쁨 때문인지 나머지 의식을 차마 놓지 못하고 계신다.

경사진 바위 사이를 뼈마디가 부러지도록 부딪치면서 흘러가는 산골 물처럼 힘들게 살면서도 불평 한마디 않고 살다 가신 어머니도 그러했지만 억울한 세월 때문이었는지 침묵이 대부분의 말씀이셨던 아버지도 아름답다.
평소에 몰랐던 아버지의 아름다움, 하늘 가는 밝은 길 앞에서 새 신 갈아신고 신발 끈 바짝 당겨 매는 이때서야 후회와 만정(萬情)이 내 가슴을 찢고 들어와 날 선 정(丁)으로 심장 복판을 쾅쾅 쪼아 두드리며 비문을 새기고 있다. 2007년 시월, 서러움을 토해내는 가을이 동 동 발을 구르다 산천에 둥그러져 눕는데…

- 이 글은 필자의 부친이 임종 사흘 전 병원 응급실에 실려가 사경을 헤맬 때 쓴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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