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칼럼/ 한인 젊은이들의 초상

2007-11-14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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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영(논설위원)

얼마 전에 300번 째 이력서를 제출해서 미국기업에 취직했다는 2세 청년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이렇게 훌륭하게 목표를 향해 도전하고 문제를 극복해 나가는 젊은이를 볼 때 매우 든든하고 자랑스럽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대부분의 한인자녀들은 어떠한가. 너무 소극적이고
유약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1세들과 달리 미국에서 자란 2세들은 가정에서 부모의 지나친 보호와 사랑, 그리고 풍족한 미국의 물질문명 속에서 안이하게 자랐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이들은 직장에서나 사회에 나가 조금만 어려워도 잘 이겨내지 못한다. 1세들이 이민 초기 보여준 강인함과 의지, 그리고 굳건한 투지나 용기는 거의 기대하기가 어렵다. 이 시대 우리 젊은이들의 초상(肖像)이 그렇다면 우리 사회의 미래를 어떻게 기대할 수 있겠는가. 이것
은 이민이라는 특수한 환경 속에서 과보호해온 가정과 사회의 책임이 크다고 할 수 있다.


유대인은 아기가 태어나자마자 즉시 찬물에다 잠간 담근다고 한다. 일본의 경우도 지방에 따라 그와 비슷한 습속이 있는데 강인한 아이로 키우기 위해서 그런다는 것이다. 동물의 세계에서도 호랑이는 새끼가 어느 정도 자라면 절벽 아래로 밀어서 떨어뜨린다. 그래서 살아남은 새끼는 기르고 그렇지 않은 새끼는 그냥 버려둔다고 한다. 그 것은 강인한 새끼만 호랑이로 인정하고 기르겠다는 뜻이다. 독수리도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 결국은 새들의 왕자로 비상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한인 부모들을 보면 대부분 ‘그저 자식 때문에 고생한다’며 모든 기대를 자녀에게 걸고 어디 다칠 새라, 어디 아플 새라, 어디 불편할 새라 잠시도 그냥 두지 않고 조금만 덥거나, 춥거나 힘들어도 그냥 그대로 보고 두지 못한다. 그것은 결과적으로 어른이 되어도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는 것을 약하게 만드는 것이 된다. 그래서 인간관계나 직장생활에서 조금만 힘들고 어려워도 휘청거리며 넘어지고 자빠지게 되는 것이다.

이민 1세들은 일제시대 극심한 압박을 겪어냈고 피비린내 나는 6.25를 체험했으며 전쟁 후에 잿더미에서 맨손으로 조국 근대화의 건설을 이루어 내었다. 그러면서도 사실상 자식들에 대해서는 온갖 염려와 걱정, 그리고 보살핌으로 ‘약하게 약하게’만 키우고 있다. 1세들은 자녀를 미국이라는 신세계에서 당당한 2세로, 당찬 1.5세로 키울 책임과 의무가 있다. 미국에서 자랐건, 한국에서 자랐건 자녀 또한 자기 앞의 생을 살아야 할 책임과 권리가 있다. 그런데 그 것을 혹 부모들이 가로 막고 있는 것은 아닌지...

지나친 염려와 사랑은 오히려 자녀를 수동적이고 소극적으로 만들 뿐이다. 어른이 되어도 자기 일을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지 못하게 된다면 크게 잘못된 것이다. 때가 되면 자녀들을 자유롭게 풀어놓고 스스로 전진하고 도전하게 하는 것은 부모의 할 일이다. 부모는 자녀가 용기있는 사람이 스스로 되도록 자문역할로 만족해야 한다.

자녀가 어느 정도 크면 부모는 이래라, 저래라 결정할 권한이 없다. 사실 언어 면에서나 이 사회에 대해서 안목도 어쩌면 부모보다 훨씬 앞서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의 판단과 결정을 존중하고 인정해 주는 것은 용기있는 자녀로 만드는 부모들의 첫번째 자세이다. 물론 미국이라는 낯선 땅에서 자녀를 세상으로 내보내기에는 염려되고 걱정되는 점이 없을 수는 없다. 그렇다고 만년 어린아이로 치마폭에 감싸고, ‘안방 퉁수’를 만들어서는 더 더욱 안 될 것이다. 기독교 윤리관에서 의하면 자녀는 내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잘 키워서 훌륭한 사회인이 되도록 내게 잠시 위탁한 것이다. 적극적이고 강인한 자녀로 만들기 위해서 호랑이가 새끼를 벼랑으로 내몰고, 독수리가 그렇듯 부모들도 자녀를 사회로 내 보내야 한다. 그래서 실패를 이기고 당당히 사회의 일원으로 성장해 가는 모습을 한 걸음 뒤에서 바라보며 박수치면서 격려해 주는 것이 부모들의 정 위치이다.

한국의 모 그룹의 회장처럼 자식의 복수전을 하기 위해 폭행을 시범 보이고 유치장 신세가 되는 망신살을 연출해서는 안 될 것이다. 자식대신 유치장을 가는 것은 가능할지 몰라도 그 인생을 대신 살아줄 수는 없는 것 아닌가. “하늘이 큰일을 맡기기 전에 먼저 고난을 준다”는 만고의 진리를 아무 염려 말고 자녀들에게 확실히 적용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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