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아메리카의 한국인

2007-11-08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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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일(전 MBC 아나운서)

어느 민족이건 간에 이민 초기에는 이중문화를 안고 살아간다. 복합문화에서 오는 정신적 부담감이 인간 본성을 자극하면 이질적(異質的)인 처신이 불거진다. 문제가 없을 때에는 미국식으로 살고, 불편할 때에는 한국식으로 따지는 야누스와 같은 태도가 그것이다.

미국식(American Way)으로 처신하면 정이 없어 보이고 박절하게 보인다든지, 한국식(Korean Way)을 고집하면 어색해 보일 뿐더러 딱딱하게 느껴지는 것은 이른바 이중문화의 고충에서 나타나는 갈등의 징후다.이민생활에 뚜렷한 공식이 있는 건 아니지만 이민자마다 겪어야 하는 코스가 있는게 분명하다.


이민 정착에 이르기까지 일정한 대가를 치른 후에야 생활의 궤도를 잡기 때문에 이민생활을 ‘한 권의 소설책’으로 비유하는 모양이다. ‘마음고생’ 없이는 버티기가 힘들기에 이민자의 삶이 벅찬 것이다.미국식은 현실이라서 외면할 수 없는 일이지만 한국식을 뒷전에 놓고 살자니 자기 원형의 상실감에서 오는 공허함으로 허전한 정서에 젖는다. 이중문화를 안고 산다는 사실 자체가 부담스런 일인데다 생소한 이질문화를 극복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자신도 모르게 누적된 스트레스는 정신건강을 좀먹고 거기다 주변 사람들과 마찰이 겹치면 삶이 무거워질 수 밖에 없다.믿는 사람에게 실망하면 좌절하기 마련이고 인간관계에 생기가 감돌게 되어 있다. 사람에게 부
대끼며 사는 일처럼 피곤한 일이 없다. 이민사회에서 반목이나 갈등이 자주 발생하는 것은 흔히 말하는 민족적 기질이라든가 개인적 근성에 연유한다기 보다는 감정 장애를 다스리기 힘든 이민환경 탓으로 이해하는 편이 훨씬 가벼울 것 같다. 이민자들 간에 발생하는 불협화음들은 복합문화가 빚어낸 일과성 현상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에 정착한 소수민족들이 저마다 집단적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지만 한인들처럼 자신감 갖고 사는 민족이 흔치 않다. 모였다 쉽게 흩어지고 흩어졌다 다시 한순간에 모이는 응집력 또한 타민족이 흉내낼 수 없는 타고난 민족적 기질이다.사랑이 있고, 미움이 있고, 눈물이 있고, 정(情)이 넘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인지 유난히 의견이 자주 엇갈리고 사소한 일에 마음 다치는 일도 많다. 이해관계로 긴장하기도 하고 때로는 이유 없이 경멸을 보내거나 반목하는 경우가 비일비제하다.

작은 일을 크게 보면 큰 일이 되지만, 큰 일을 작게 보면 작은 일이 된다. 한인들은 이민 100년 동안 헤아릴 수 없는 숱한 사연들을 아메리카에 뿌렸다. 미움이 있으면 사랑이 따르는 법, 위안과 격려가 넘칠만한 연륜도 된 것 같다. 땀과 눈물로 제 1의 인생을 시작한 게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반백이 되어버린 뒷모습이 쓸쓸해 보인다. 더 힘 빠지기 전에 따뜻한 마음 미련 없이 주고 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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