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재난을 겪은 뒤

2007-11-05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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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효섭(목사/아동문학가)

남가주의 산불은 세계의 이목을 끈 대재난이었다. 그 범위는 7개 카운티 700 평방마일에 이르고 2,300채의 건물을 태우며 14명의 사망자를 냈다. 카트리나 때는 물이 무섭다고 생각하였는데 불의 위험도 물에 못하지 않는다. 이런 때일수록 우리 모두가 따뜻한 마음을 전해 이재민들의 고통을 나누어야 하며 재난을 당한 당사자들도 좌절하지 말고 용기를 내어 다시 일어서야 한다.

카인 클리슨 박사는 재해경제(Economics of Disasters)란 말을 썼다. 대재난 뒤에 경제가 좋아진다는 이론이다. 1단계는 손실의 기간, 2단계는 ‘간접손실’의 시기로서 실업 증대와 여가활동이 위축된다. 그러나 반드시 3단계가 온다. 회복과 재건의 기운을 타고 돈이 풀리며 고용이 증가하고 소매 거래가 활발해 진다. 건축자재에서 식품까지 거의 모든 품목에서 매매가 활성화 된다. 그러니 장기간으로 보면 재난을 당한 것이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다. 침체하였던 경제가 재해지역에서 활발해지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불평하고 넋두리를 늘어놓는 것은 너무 가까이만 보기 때문이다.


나의 부친은 냉수마찰을 하는 습관이 있어서 추운 겨울 아침에도 웃통을 벗어젖히고 “찬 맛이 좋다”고 말씀하시던 것을 기억한다. 찬 맛을 아는 것은 온상의 아늑함을 즐기는 경험보다 더 중요하다. 터널 속에 들어가 어두워졌다고 불안해 할 필요는 없다. 조용히 기다리면 된다. 가끔 etour’ 표지판을 본다. ‘길이 막혔으니 돌아가라’는 뜻이다. 돌아가는 것은 시간도 걸리고 유쾌하지 않지만 그래도 목적지에 빨리 가려면 돌아가야 한다. 건강 상실, 사업 실패, 재난, 직업 상실 등은 잠깐 돌아가라는 푯말로 보면 된다. 어리석은 자는 쉽고 넓고 즐거운 길만을 골라 가다가 결국 돌이킬 수 없는 수렁에 빠진다.

이번 산불보다 더 큰 산불이 난 적이 있다. 1991년 10월 20일 캘리포니아주 이스트베이에서 시작된 불은 3,000채의 건물을 태우고 25명의 사망자를 냈다. 그곳은 ‘미술가의 골짜기’로 불렸으며 백 명에 가까운 화가, 조각가, 사진작가들이 모여 살았다. 숲과 집이 문제가 아니라 그들의 귀중한 작품들이 재가 된 것이다. 그 중에 헝거 씨가 있었다. 15년에 걸친 그의 조각 200점이 탔다. 그러나 그의 머리에는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골짜기에 널려있는 불탄 쇠붙이와 나무들, 기타 녹은 알루미늄과 금속들을 재료로 하여 조각품을 제작하자는 생각이었다. 그의 굴하지 않는 의지는 다른 예술인들에게도 번져갔다. 마르타 프레불 씨는 종이나 천에 물감을 들이는 예술가였는데 재를 가지고 물감을 개발하였다. 그들은 맹렬한 열정으로 산불을 주제로 불탄 것들을 재료로 하여 작품을 제작하였으며 1992년 10월, 대화재 1주년을 기념하는 Fire Art Project란 전람회를 열었던 것이다.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겨울철 놀이로 팽이치기가 으뜸이었다. 작대기에 끈을 달아 팽이를 친다. 무자비한 것 같아도 팽이는 쳐야 돌고 내버려두면 쓰러진다. 팽이가 갈채를 받을 때는 돌아갈 때이며 누워있을 때가 아니다. 게다가 팽이에 여러 가지 색깔을 입혀 돌리면 정말 멋졌다. 팽이의 아름다운 율동은 아픔과 채찍 속에서 창조되는 것이다.어렸을 적의 놀이 기억 중에 연 날리기를 뺄 수 없다. 연은 바람이 필요하다. 바람은 방해가 아니라 연을 더 높이 멋지게 날릴 수 있는 필수조건이다. 이것은 돛단배의 경우에 더욱 확실하다.

악이 있어 선을 알 수 있듯이 고통이 있기에 기쁨을 알게 된다. 내 기억으로는 육체의 고통 중에 영혼의 유익을 주지 않았던 고통은 한 가지도, 한 번도 없었다.야외예배가 계획된 날, 아침부터 비가 내리고 있었다. 한 교인의 전화가 걸려왔다. “목사님, 점심 때쯤이면 비가 멈추겠죠?” 신학교에서 기상학까지는 배우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좀 더 깊은 의미로 대답했다. “비는 반드시 멈추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고통의 해결을 외부에서 찾지만 사실은 고통과의 용감한 투쟁 속에 길이 있는 것이다. ‘아플 때는 잘 앓아야 한다’는 말처럼 고통을 지그시 씹어보는 인내의 맛을 터득할 때 고통을 극복할 수 있다. 요즘 사람들은 조급해서 기다림의 맛을 모르는데 괴로울 때 기다림의 예술을 배워야 한다.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이다. 모진 북풍이 강한 바이킹과 그들의 항해술과 조선술을 개발시켰다. 요즘 인류학자들이 지적하는 것은 기술 향상 면에서 추운 나라들이 따뜻한 나라들 보다 앞선다는 것이다.뉴질랜드에 키위나 펭귄이 많다. 그들은 날지 못한다. 환경이 좋아 걸어만 다녀도 먹이가 많으니까 진화 과정에서 날개가 퇴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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