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부모와 자식 사이

2007-11-05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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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휘(언론인)

우리나라 부모가 자식에게 바치는 사랑과 정성은 세계에서 1등이다. 유아시절부터 대학에 들어가기까지 쏟는 부모의 정성은 단순한 모성애나 부성애의 차원을 넘어선다.대학을 졸업하고 결혼을 해도 시가나 친정의 애프터서비스는 그칠 줄 모른다.신혼부부가 살아가며 하나 하나 살림을 장만하는 재미, 사글세 방부터 시작해서 전세집, 내 집 마련으로 이어지는 과정의 보람과 즐거움은 제쳐놓고 우선 편한 게 좋다는 식이다. 할 수만 있
다면 패키지 상품처럼 모든 걸 몽땅 준비해 주는 부모가 일등 부모다.
어느 부잣집 며느리의 사연은 금전 만능 풍조의 아픔을 대변하고 있다. 어려운 집안에서 자란 이 젊은 여인은 부잣집 며느리로 시집가게 된 것을 큰 복으로 알고 정성을 다해 시부모와 남편을 섬겼다.

꿈같던 잠시의 신혼시절이 지난 후 돈 많은 남편은 예쁘고 착한 아내는 관심 밖으로 밀어내고 이 여자 저 여자를 넘나드는 난봉꾼이 되어 있었다. 가엾은 조강지처의 하소연과 읍소는 소용이 없었다. 돈 있는 젊은 사내에게 예쁘고 섹시한 여인은 얼마든지 줄을 서는 세상임을 어이하랴.끝내 보따리를 싸들고 시댁을 나선 부인은 신세타령을 이렇게 늘어놓았다.“우리 집에는 없는 게 없어요. 시부모님이 결혼 초부터 모두 갖추어 주었기 때문에 집, 가구, 생활용품 아쉬운 게 없답니다. 그러나 그것은 내 것이 아니었어요. 나는 다만 이 집에 잠시 들어와 사는 가정부에 불과했던 거예요. 돈 많다는 것이 오히려 화근이었지요”


가정에서, 부모와 자식 사이에 돈이 장벽이 되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다.
자식이 부모를 섬기고 모시는 것은 영장동물만이 갖는 높은 가치 실현이다. 우리는 이를 효(孝)라 하고 사회윤리, 인간 도리의 으뜸으로 여기며 살아왔다. 그러나 남을 의식해 마지못해 하는, 형식 갖추기 효행은 본래의 효가 아니다. 공경하는 마음, 사랑하는 마음, 보고싶은 마음, 염려하는 마음이 없이 다만 명절이니까, 생일이니까, 어버이날이니까 마지못해 찾아가고 선물하는 행동거지는 서로를 힘들게 할 뿐이다. 열 시간, 스무 시간 고속도로에서 빚는 2천만의 엑서더스는 사랑의 메아리일 수도 있고, 고통의 행렬일 수도 있다.

노후에 자식이 돌보지 않아 애완견 한 마리 안고 마을 공원에 나와 하루를 보내는 서양 할머니, 할아버지를 불쌍히 여겨온 우리다. 아무리 산업사회 물결이 드셀지라도 우리 자녀들의 부모에 대한 마음은 서양과 같을 수 없다. 살인마, 지존파, 막가파도 제 어버이 생각은 간절하다. 사는 게 뜻과 같지 않아서 그렇지 형편만 허용한다면 한국의 자식들은 부모를 가까이서 모시고 자주 찾아보고 싶어한다. 하기야 한달에 전화 한통 하지 않는 예외의 경우도 있긴 하지만.지금 우리는 ‘농경사회의 효도’를 그대로 행할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이제 어버이들도 효에 대한 인식을 새로이 해야 한다. 피나는 경쟁구조 속에서 시달리고 있는 젊은이들을 얼마쯤은 자유롭게 놓아주자. 자식이 국가 사회의 일원으로 헌신하고, 혹은 세계화시대에 국제무대에서 제 몫을 다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대견하고 자랑스러운가. 탈 없이, 티 없이 잘 자라주는 손자 손녀가 있는데 어찌 노년을 외롭다 하리.한평생 부모 자식의 연결고리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불합리와 우리다운 가족제도의 정겨운 모습을 조화시킬 수 있는 21세기형의 미풍양속이 속히 움텄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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