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조선시대의 순교자들

2007-08-13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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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명훈(의사/시인)

한국의 젊은 선교 봉사자들(23명)이 아프간에서 납치되어 2명은 이미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해결의 방법을 몰라 답답한 마음을 달래고 있는 상황이다. 인질사태의 조속한 해결을 희망하면서 우리 선조가 남기고 간 신앙의 발자취를 감히 정리하여 본다. 이 글은 정두희의 ‘신앙의 역사를 찾아서’와 박도식의 ‘순교자들의 신앙’ 등을 참고로 하였다.

인질사태 이후 매스컴에서는 한국이 예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세계에서 미국 다음으로 많은 1만명 이상(천주교와 개신교)의 선교사를 파견하고 있다고 한다. 이는 우연히도 1만명 이상의 조선시대 순교자 수와 엇비슷해서 기묘한 우연이라고 생각된다.하느님의 교시는 한반도가 절대 절명의 위기상황에 처해있을 때마다 한 줄기 빛, 우리가 알지 못하는 빛으로 징표를 보여주었다고 믿기 때문에 또 무슨 변고가 일어날 것인지 두려움이 앞서기도 한다.


조선왕조가 들어선 이후 임진왜란까지는 당쟁을 제외하고는 소위 평화(?)의 세월이었다. 2차에 걸친 임진왜란(1592~1598 선조) 당시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 부대의 세스페데스 종군신부는 포르투갈 사람으로 한반도에 온 최초의 외국인 신부로 약 1년 동안 머물렀지만 조선인에게 선교한 기록은 없다. 그 당시 일본으로 잡혀간 조선인 포로 약 5만명 중에서 2,000명 정도가 천주교인이 되어 그 중 21명이 순교하였으며 순교자 중 9명은 일본인 순교자와 함께 복자의 반열에 올랐다고 한다.

1603년(선조 36년) 홍문관 부제학인 이수광은 당대의 실학자였는데 북경으로 간 사신들이 갖고 온 세계지도며 서적을 접하게 되었다. 그 중에 ‘천주실의’와 ‘교우론’은 종교적이기 보다는 그의 학문적인 호기심을 끌기에 충분했으며 ‘지붕유설’을 저술하여 천주학을 조선에 서양과학과 함께 소개하였으며 그로부터 200년 후 목숨을 바쳐서 지키려는 신앙의 씨앗이 될 줄 누가 알았으랴.

신유박해(1801 순조 1년), 기해박해(1839 헌종 5년), 경신박해(1860 철종 11년), 병인박해(1866 고종 3년) 등을 거치며 많은 천주교인들이 참혹한 방법에 의해 목숨을 잃었으며 거의 1세기 동안 계속된 박해로 천주교인들은 화전민으로, 옹기장이로 숨어 살며그들의 신앙을 지켰다.

조선 초대 신부 김대건 성인이 남긴 기록에는 “1791년에서 1839년 사이 최소한 800명이 순교하였다”하며 가장 혹독했던 병인박해는 대원군(흥선대군)이 주도했는데 ‘한국천주교회사’에 의하면 “1866년부터 1876년까지의 10년 동안 2만3,000의 교우 중 1만여명이 순교했다”고 기록하고 있다.대원군 역시 무너져가는 왕권을 바로 세우기 위해 천주교를 반역 세력으로 박해했다고 하지만 그는 스스로 정권을 아들에게 돌려주지 않을 수 없었으며 시대는 더 이상 그의 것이 아니라는 하늘의 뜻을 알지 못했다. 국가와 백성은 통치철학의 변화를 요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1887(고종 23년) 조불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된 이후 비로소 종교의 자유가 허용되었으며 조선에서 복음이 선포된 1784년에서 신앙의 자유를 얻게 된 1887년까지 103년 동안 최소 1만명의 순교자(그 중 103인은 성인품에 오름)들이 오늘날 세상에 빛을 던지고 있다.

탈레반 폭도들도 이 빛을 보고 있을까? 인질들의 무사귀환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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