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똑똑한 사람들

2007-08-04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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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태(시인)

음력으로 칠월 칠석, 로맨틱하기가 그지없는 날이다.
무슨 연유에서든지 간에 헤어져 있던 견우와 직녀가 은하수 긴 강을 건너서 만나는 날인데 약삭빠른 장사꾼들이 널리 선전을 해 놓은 서양의 발렌타인 날은 잘 알면서도 한국의 아름다운 칠월 칠석을 우리들은 모른다. 아니 잊은 지가 오래다.

칠월 칠석은 내면의 깊은 사랑 같고 발렌타인 날은 어쩐지 외면의 유혹 같은 사랑 같다. 어디 이 뿐이랴! 위스키는 알아도 국화주는 모르고, 장미꽃은 알아도 억새꽃은 모른다. 하와이에 대해서는 관광 안내원처럼 말해도 제주도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르고, 바이얼린의 음악은 알아도 거문고나 가야금의 음악은 모른다. 우리 것이라면 뭔지 촌티가 나거나 시대에 한참 뒤진 구닥다리로 취급하는 사람들, 경주의 천문대가 어떠하고 금속활자의 출현이 어떠하고, 측우기나 해시계를 말해 보았자 그 가치를 서양
것들 위에다 놓으려 하지를 않는다. 속옷 같은 우리 것보다는 겉옷 치장에 관심이 더 많은 서양 것에 집착을 하는 것은 남에게 똑똑하게 보이면서 눈길을 끌기 위해서다.


내용의 핵심을 보고 조용하기보다는 겉을 보고 요란하게 비판하는데 연습이 잘 된 똑똑한 사람들은 학벌이 좋고 머리가 좋고 생각의 회전이 빠른 무리들이다. 말을 해도 영어를 섞지 않으면 똑똑해 보이지 않아서인지, 아니면 한국말만 하면 신분이 낮춰 보이기 때문인지 심심치 않게 영어를 섞어서 말을 한다.똑똑한 사람들은 소위 일류라고 불리던 고등학교와 일류대학을 졸업하면 보란듯이 취직은 먼저 하면서도 조퇴나 명퇴를 당할 때까지 거의 다 그 길에서 인생의 절반 이상을 소진한다. 승진의 재미는 있겠지만 항상 피고용인이다.

현대의 고 정주영 회장이나 삼성의 고 이병철 회장, 한진그룹이나 대한항공의 조중훈 회장 등 성공한 사업가들은 학벌이 좋거나 똑똑하지는 않았지만 미래에 올 경제 내용의 핵심을 보고 학벌 좋은 똑똑한 사람들을 수하에 고용하고 일거리를 지시하며 사업을 운영하였다. 사람의 내용을 보는 눈이 있고 시대의 내용을 보는 눈이 있고, 아무도 닦아놓지 않은 거친 산야에 뻗어가는 길을 미리 보는 눈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세계의 기업으로 성공을 한 것이다.이태리의 피렌체 도시에는 박물관 앞에서 관광객의 얼굴을 그려주며 생활을 하는 거리의 무명화가들이 많은데 ‘마르코 라마포터’라는 무명 화가도 그 중에 한 사람으로서 20년이 넘도록 관광객의 얼굴만을 그려왔다. 이제는 제법 유명해진 덕분인지 이 화가 앞에는 기다리는 사람이 많다.

“왜 당신 앞에는 많은 사람들이 줄을 지어 기다리고 있습니까?” 어느 잡지사 기자가 물었다. “나는 손님의 얼굴을 보면서 그림을 그리지만 손님의 한 얼굴에는 여러가지 성격이 복합되어 있지요. 나는 그 여러가지 성격 중에서도 좋은 점을 찾아서 손님의 얼굴 그림에 넣어 그림을 그려줍니다. 그림은 외관만을 표현하는 사진이 아닙니다. 손님들은 그림 속에 어떤 내용이 있기를 바라고 있으며, 기왕이면 좋은 내용을 기대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깨닫고 될 수 있으면 손님의 성격 중에서 가장 좋은 쪽을 찾아서 그림에 넣어주려고 노력을 합니다”

미술대학을 나오지 못해서 학벌 좋은 똑똑한 화가는 되지 못했으나 살면서 터득한 득도(?)의 지혜 덕분에 거리의 유명 화가가 되었다. 사진처럼 외면만 그리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내면을 그려보려는 노력이 그를 유명한 거리의 화가로 만든 것이다.대학을 나오지 않았어도 아침마다 환하게 다가오는 햇빛, 학벌이 없어도 조금이나마 어두움을 걷어내려는 밤 달이나 별들, 뒷 배경으로 재산이 없어도 비바람에 꺾이지 않는 무성한 나무들, 인기몰이를 하지 않아도 아름답게 피는 꽃들, 주인공이 아니더라도 산골을 잘 타는 산골 물, 있는 그대로에서 말없이 자기의 최선을 다 하는 정성이 똑똑한 사람들 보다도 시끄럽지 않고 우리에게 감동을 준다.

짐승들에게도 눈은 있다. 그러나 그 눈은 먹이를 찾는데 쓰는 눈이고 사람들의 눈은 외관을 뚫고 속을 헤아리는 능력을 가진 눈이다. 가족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알고 친구와 이웃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알고 사회나 국가가 안고 있는 내면의 고통을 헤아릴 줄 안다면 그 눈이야말로 인간, 아니 사람의 눈이다. 그 눈은 똑똑해서 나오는 눈도 아니고 겉치레가 근사해서 나오는 눈도 아니다. 그 눈은 자기를 내세우지 않고 상대를 헤아릴 줄 아는 속 깊은 안목에서 비로소 온다. 그러나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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