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냄비 기질의 한민족들

2007-07-21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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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휘(언론인)

1997년 국가가 부도나기 직전에 우리는 나라의 총력을 기울여 겨우 수습을 했다. 온 나라가 ‘금 모으기 운동’까지 벌여 20억 달러를 만들었고 외국에서도 한국인의 뜨거운 애국열을 칭송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한숨을 돌린지 반년이 되지 않았을 때, 정작 뼈를 깎는 고통은 이제
부터라 싶었는데, 주춤했던 고속도로의 행락차량은 다시 줄을 잇기 시작했다. 백화점의 외제상품 코너에는 귀티 나는 여인네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고 고급 레스토랑은 다시 만원사례를 이뤘다.

돈 많은 사람들이 감춰두었던 돈, 실명제가 풀리고 고금리를 맞아 눈덩이처럼 불어났으니 어찌 쓰지 않고 배길 수 있었겠나마는 반짝 달아올랐다 쉽게 식어버리는 냄비 기질이 IMF 한파에서도 예외가 아님을 여실히 드러낸 셈이다.저력이 풍부한 영국과 같은 선진국도 IMF 체제를 극복하고 정상화하는데 3~4년이 걸렸다. 온국민이 허리띠를 졸라매고 꾸준히 고통을 감내하면서 말이다. 자원도 없고 자유경제체제의 배경도 미약한 동방의 작은 나라 대한민국, 그나마 반 토막으로 허리가 잘려서 국가의 안전이 위
협을 받고 있는 처지가 아닌가.


2002년, 월드컵 축구 본선 티켓을 땄을 때 차범근 감독은 국민의 영웅으로 가는 곳마다 칭송의 대상이었다. 다섯달 후 다이너스티컵 경기에서 부진한 결과를 안고 귀국한 차 감독에게 보낸 국민의 눈길은 돌변했다. 대표팀 감독이라는 자리가 게임의 승패와 영욕을 같이하는 것이긴 하
지만 인격적인 모욕과 개인적 비방까지 해대는 국민들의 의식수준을 보며 선진국이 되기엔 아직 멀었다는 생각이 들었다.경기 내용에 대한 비판은 당연하다. 그러나 다음을 위해 분발할 수 있도록 격려하고 용기를 북
돋아주는 일면도 있어야 한다. 우리 올림픽 국가대표선수들은 막상 경기장에 나가면 평소 기록에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결과에 따라 찬양과 비판의 소리가 순간적으로 달라지는 국민성을 알기 때문에 심리적 부담이
엄청나게 적용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그 무렵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목격한 일이다. 국제 축구시합을 중계하는 TV 화면 앞에 사람들이 몰려있었다.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장면에서 한국선수가 크게 실수를 하자 누군가의 입에서 “저런 놈은 죽여야 해!”라는 소리가 스스럼없이 튀어나왔다. 그 사람이야말로 이 공동체 사회
에서 살아갈 자격이 있는 것인지, 서글픔을 넘어 오싹 소름이 끼쳤다.
불같이 급하고 토네이도처럼 돌변하는 저돌적 성미는 이성을 마비시키고 판단력을 잃게 할 뿐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품질을 의심케 한다.

한국사람은 빨리 달아오르고 잘도 잊어먹는다. 와우아파트가 무너졌을 때의 다짐은 어디로 갔는지, 다시 삼풍백화점이 폭삭 내려앉았다. 성수대교가 붕괴된 다음에도 경부고속철도는 부실 투성이로 드러났다. 3,000만명을 불바다 속에 몰아넣고 천만명의 이산가족을 낳은 6.25 전란을
겪었는데도 국민의 안보의식은 실종된지 오래다.은근과 끈기는 가난과 전화(戰禍) 속에서 질기게 살아가는 민초들의 생존본능이 꿈틀거리는 발
효작용일 뿐 우리에게는 듬직한 항심(恒心)이 없다. IMF 위기를 맞은 것도, 이에 대처하는 것도 발등의 불 끄기에만 급급했을 뿐 내일을 생각하지 못한다는 비판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오늘 하루만 살다 갈 것처럼 살아서는 앞날이 걱정이다.

촐랑대는 변덕쟁이 성질이 민족기질로 고질화 되어서야 쓰겠는가. 끈질긴 항심을 후대에 물려줄 한국인의 DNA로 숙성시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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