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무(無)

2007-07-17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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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우(아트갤러리)

우리 말에 ‘있다’는 반대말이 ‘없다’이다.보편적으로 우리는 눈 앞에 보이는 존재하는 사물만을 “있다”고 하며 보이지 않는 것은 “없
다”고 한다.나의 버릇은 아침 출근 때 허둥지둥 찾는 것이 양말이다. 옷장 서랍 속을 뒤적이며 양말이 없다고 투덜댄다. 시간이 조급하면 조급할수록 눈 앞에 보이지 않는다.그런 버릇을 알고 있는 아내는 태연히 천천히 보라고 한다. 양말이 눈앞에 있는데 조급함이 시야를 흐리게 만든 것이다.

우리 한글은 소리글자로서 뜻글자인 한문과 다르다.‘없다’는 뜻을 한자로 표기하면 없을 ‘무(無)’자를 쓴다. 무(無0라는 글자는 수천년 내려오
면서 그 개념이 조금씩 변하였다.예를 들면, 불교에서는 유(有)와 대립하는 상대적인 뜻에서 무(無)가 아니고 유, 무의 대립을 끊고 오히려 유(有), 그 자체도 성립시키며 근원적, 절대적, 창조적인 것을 말한다.
도교의 도덕경에는 무(無), 그 자체가 도(道)인 것이다. 무(無)나 유(有)가 이름이 다를 뿐이지 같은 곳에서 나왔다고 했다.불교에서 말하는 무(無)와 도교에서 말하는 무(無)의 개념이 다르다. 그런 개념을 모르고 단순히 지금 우리들이 사용하는 단어 무(無)를 ‘없다’라고만 해석하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 될 것이다.


2000년 전의 글 무(無)와 오늘 우리가 사용하는 무(無)는 어떻게 다른가? 그런 것을 밝히는 것은 훈고학자들의 몫이다.있으면 있고 없으면 없는 것이지 무엇이 그리 복잡한가, 이 바쁜 세상에 골 아프게.맞다! 그런데 왜? 있으면서 “없다” 하고 없으면서 “있다”고 하는가. 도둑질 해서 모은 재물은 있으면서 없다고 숨기고 사기를 치는 사기꾼은 없으면서 있다고 거들먹 거린다.

순진한 우리들 머리로서는 있는 것인지 없는 것인지 헷갈리기 때문이다.
특히 요즘 한국 정치판에서는 그 농도가 갈수록 점점 깊어간다. 유권자의 눈을 흐리게 하는 것이 안타깝다.사람의 행복을 지수로 나타내는 행복지수가 가끔씩 신문지상에 오른다. 조사기관에 따라 조금씩 차이는 있으나 돈 많은 나라 사람들이 가난한 나라 사람들 보다 오히려 행복지수는 낮다.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이름도 들어보지 못했던 나라 사람들의 행복지수는 반대로 높다.

돈과 물질이 인간 행복을 좌우하지 못한다는 증거이다.배 고팠던 60년, 70년대가 독재라고 아우성치던 그 때가 모든 게 풍부한 지금, 민주주의가 발전했다는 지금 보다 더 행복했었던 것 같다. 그 땐 우리나라의 행복지수를 가늠할 조사기관이나 조직도 없을 때이니 요즘과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감각적으로 그렇다는 것이다.꼬마 시절 보았던 김용환 화백의 그림이 지금도 생각난다. 거지와 아이들이 불 구경을 한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한 마디 한다. “아빠, 우리는 집이 없으니 불 날 걱정 없어 좋지?”
아버지의 대답, “맞다. 그게 모두 아비 덕인 줄 알아라”있다, 없다, 돈이 우리의 행복을 좌우하지 못한다. 재물로 말할 것 같으면 없는 것 보다 있는 게 몇 백배 좋다.

그러나 그 재물은 어디에서 만들었는가? 사회라는 구조 속에서 만들었지 않은가?그 사회에서 만든 돈은 그 사회로 다시 환원하는 게 기업 경영의 근본이다. 돈 있다고 거들먹거리고 교만을 피운다면 오히려 없는 것 보다 못하다. 무소유가 가장 행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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