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꺼지지 않는 불씨

2007-07-12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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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자(의사)

금년 5월에 선배이신 내과의사 이범수 선생이 가상보(Rhee Family Genealogy)라는 책을 동시에 한글과 영어로 된 이중언어로 출간하였다.
이 책의 서문은 엠페도클레스의 말을 인용하는 구절로 시작한다. “사람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삶의 극히 일부밖에는 보지 못한 채 연기처럼 사라진다. 마치 자신이 마주친 것이 전부라는 헛된 믿음을 안은 채. 그렇다면 누가 전체를 보았다고 주장하겠는가? 내가 가상보를 쓰게 된 이유를 묻는다면, 이 족보가 우리가 누구인가를 올바르게 평가하고 우리 조상과 가족의 역사적 재보를 우리 후손들이 공유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우리의 전통문화를 알려주고 싶었다”왕손으로 태어나 풍운아였던 양영대군의 17대 손인 닥터 리는 이국에서 뿌리를 내린 후손들에게 정체성을 심어주고 싶었을 것이다.

이 책의 저자는 한국의 전통 가족 개념을 미국의 이질문화에 접목시켜, 본받을 만한 가정을 이룩한 분이다. 소아과 전문의사인 부인의 헌신적인 내조가 있었기 때문이다.큰 아들은 이비인후과 의사이고 작은 아들은 하버드 의과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하고 전국 의사협회에서 선정된 최고 의사(Best Physician)라는 영예를 거머 쥐었다. 앞으로도 지금 일하고 있
는 최첨단 방사선 치료 분야에 큰 공헌을 하리라 믿는다.이 책은 단순히 전통 가족 구조의 종적인 관계를 넘어 한국 문화유산 윤리와 가치관, 풍습, 언어 등 수많은 자료들이 집약된 방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책은 또한 봉건시대, 일제시대, 6.25동란의 격동의 시대의 물줄기를 따라서 생생한 체험의 이야기로 장엄하게 펼쳐지는 대하 드라마다.
일본의 침략으로 왕실의 몰락과 함께 혹독한 일제 식민지시대 어머니들이 보리를 멧돌에 갈아서 산나물과 함께 죽을 쑤어 대가족이 보릿고개를 넘긴 이야기는 눈시울을 적시게 한다.한국의 대가족이 서로 칡넝쿨 같이 얽힌 가족관계를 한국 설화와 같은 이야기로 풀어나간다.

저자의 어린 시절 야산으로 둘러싸인 한 폭의 묵화와 같은 조부님의 고향 풍경과 조상들의 유년시절의 추억담을 진솔하게 얘기한다.6.25 피난 때 저자의 아버님은 고향의 밤나무 밑에 방공호를 파고 숨어 지내는데 깊은 가을 누렇게 익은 밤송이들이 떨어져 방공호를 덮어 인민군의 눈을 피할 수 있었다.어린 소년이었던 저자는 두더지 같이 숨어있는 아버지에게 끼니를 날랐다.전쟁이 남기고 간 파편조각 같은 아픈 기억들이다.저자는 전쟁 후에도 혼란으로 이어진 군사정권 때 미국 의사 수련 초청으로 1964년 세면도구와 단 미화 100달러가 든 가방을 들고 뉴욕행(Northwest) 비행기를 타고 뉴욕에 정착하였다. 이제 그는 이방인으로 고국의 부모 묘소를 찾아가 반지꽃이 피어있는 무덤 위에 뜨거운 회한의 눈물을 뿌린다. 묘소의 비문에는 아들의 피맺힌 절규의 글이 새겨져 있다.

저자의 형님인 이인수 교수는 같은 혈통인 이승만 박사의 양자이고 이방인 프란체스카 여사의 노후를 이화장에서 모셨다.불행한 근대사의 증인이다.가상보는 이민사의 획기적인 기념비로 남는 심혈을 기울인 책이다.
바람에 날아온 흩어진 민들레 꽃씨처럼 낯선 이국땅에 씨를 뿌린 한인 이민자들의 가슴을 적실 것이다.이중언어로 된 이 책을 학교 도서관에 기증하여 후세들에게 우리 문화를 배우는데 도움을 주었으면 한다.그 책에는 우리들의 핏줄 이야기가 담겨 있다.한국의 고유문화는 화로 속의 잿더미 속에 꺼지지 않는 불씨와 같이 대대로 이어져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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