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아름다운 날을 위하여

2007-06-21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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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춘 길 (재향군인회 미북동부지회)

한국전쟁이 시작되고 서울 거리는 폐허의 도시로 전락하고 말았다. 1950년 9월 28일, UN군과 국군이 중무장한 탱크를 앞세우고 진격하여 서울을 탈환했다.북한군은 퇴각했고 중앙청에는 감격스러운 태극기가 휘날리게 되었다. 피난갔던 시민들도 돌아오기 시작했으며 도시는 점차 활기를 되찾아 갔다. 기초훈련을 받고 우리는 학생복 그대로 총을 둘러메고 태극기를 휘날리며 트럭의 앞머리에 서서 “북으로 압록강 남으로 한라산…” 씩씩하게 목이 터지도록 군가를 부르며 북으로 진격해 들어갔다. 살을 가르는 듯 거센 바람도 잊고 개성을 거쳐 사리원, 황주, 평양에 이르렀다.

통일이 눈앞에 다가온 듯한 그 때, 뜻하지 않게 중공군이 100만 대군을 이끌고 인해전술로 밀고 내려오니 우리는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국군과 UN군, 그리고 피난민이 범벅이 되어 영하 30도(섭씨)가 넘는 강추위 속에 후퇴하여 38선을 넘어 서울을 거쳐 우리 부대는 강원도 횡성에 도착하여 부대를 재편성하여 다시 전투에 임하게 되었다.11월 말경, 평안북도 덕천에서 중공군에게 포위되어 우리 부대는 전멸되었으나 간신히 우리 중대만은 포위망을 뚫고 탈출에 성공하였다. 그 후 우리는 재편성되어 8사단 포병으로 전투에 임하게 되었다. 2월 중순의 어느 날, 힘겨운 전투를 마치고 저녁을 먹고 휴식을 취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통신이 두절되고 주위가 조용하여 마치 죽음이 엄습해 오듯이 삭막하기 그지 없었다.


잠복하고 있던 중공군이 수류탄을 던지며 꽹과리를 치며 물밀듯이 언덕을 넘어 밀려오고 있었다. 순식간에 부대는 산산조각이 났고 나는 중공군의 포로가 되어 북으로 끌려갔다.중공군에 이끌려 끝없는 행진 결과 도착한 곳은 신고산에 있는 수용소. 아침식사는 중국산 좁쌀로 만든 죽과 산나물, 그리고 소금국이었다. 오전과 오후에는 정치교육을 받고 저녁 후에는
삽과 곡괭이를 메고 도로보수공사, 비행장 닦기, 포탄 운반 등의 일을 하고 밤 12시경에 돌아와 모두 시체처럼 지쳐서 쓰러져 잤다.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살 수 있다고 했던가. 나는 이곳에서 탈출을 감행했다. 이래저래 죽기는 마찬가지라는 생각에서 죽어라 뛰었다.
무엇에 걸려 넘어져 뒤돌아 보니 지뢰 끈이었다. “아! 살았구나” 드디어 UN군 품에 안겼다. “아! 자유의 몸이다”얼마나 감격스러운 일인가.
그렇다. 포로에서 돌아온 나는 다시 제 7사단 수색중대에서 전투중에 부상을 입고 육군병원에 이송되어 제대했다.

그 후 나는 평생 교편생활을 하면서 학생들에게 어떠한 어려움과 힘든 일이 있더라도, 또 불행이 닥치더라도 뒤를 돌아보지 말고 희망을 갖고 앞만 보고 달려가라고 가르쳤다. 나는 두 번씩이나 전투 중에 포로가 되었지만 결코 실망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탈출하여 자유의 몸이 된 것이다.
학도병 현충탑에는 이런 글귀가 있다.

<나 위해 사신 어머니/꿈에도 못 잊을 그리운 모교여!/그리고 내 살던 나라여!/내 젊음을 받으소서/나 역시 이렇게 적을 막아 쓰러짐은 내 후배들의 아름다운 날을 위함이니 후회 없노라>그 때 학도병들은 이름 모를 골짜기에서 조국의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그리운 모교와 부모 형제들의 모습을 그리며 슬프게도 조국의 통일을 보지 못한 채 꽃다운 나이에 이슬로 사라져 갔다. 나는 한국전쟁을 통해 분명히 보고 느끼고 체험했다. 이 싯점에 와서 누가 잘못했던 간에 용서는 해 주되 역사의 교훈으로 삼기 위해 결코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다시는 우리 민족에게 이런 시련과 전쟁이 없기를 바라기에 고국의 좋은 소식이 전해오기를 바라며 통일이 오기까지 무궁한 발전을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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