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남북 장관급 회담 파행 책임은

2007-06-12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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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일(우정공무원)

지난달 29일부터 4일간 제 21차 남북 장관급 회담이 서울에서 열렸다. 이재정 통일부 장관과 권오웅 북한 내각 책임 참사는 수석대표 접촉에서 20차 장관급 회담의 합의사항인 쌀 40만톤 차관 제공을 요구했다.

남측은 쌀 차관문제 외에도 남북 국책연구기관회의, 국방장관 회담 개최, 경의, 동해선 철도 부분 개통 등을 제안했다. 그러나 북측은 쌀 차관 제공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다른 문제들은 관심이 없는 듯 쌀 차관 약속 불이행으로 이산가족 상봉마저 전면 중단을 시사했다. 이를 두고 북측을 평소 폄훼하는 사람들은 평화 정착을 위한 남측 제안들에는 관심이 없고 쌀 차관 지원을 받아내는데에만 혈안이 됐다거나 방코델타아시아(BDA)문제를 핑계로 영변 핵시설 가동 중단 등을 하고 있지 않다는 식으로 표현한다. 이토록 북한이 쌀문제에 집착하고 비중을 많이 두는 비슷한 일화를 소개한다.


5.16 군사쿠데타 이후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은 대국민 공약으로 민간정치인에게 정권을 이양하고 군은 원대복귀하겠다고 했으나 약속을 지키지 않고 63년, 67년 선거에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헌법에 중임까지만 허용되므로 쿠데타의 주체세력들은 헌법을 개정, 3선에 재출마하도록 은밀히 추진하는 정보를 미 CIA가 입수, 압박했던 사례다.박대통령 재임기간인 60년대 말까지도 보릿고개의 배고픔은 여전해 매년 미국의 바이 아메리카 정책 4870공법에 의한 잉여농산물 공여로 근근히 아사 지경을 면해오곤 하던 중 소맥분(밀가루) 10만톤을 실은 화물선 두 척이 부두에 접하지 않고 인천 앞바다에 떠 있었다.

여늬 때 같으면 도착 즉시 주한 미국경제협조처인 유솜의 후신인 유세이드(United States Agency for International Development)에서 하역 지시가 시달되는데 7일이 경과하여도 바다 가운데 있는 미국 화물선에서 아무런 하역준비 신호가 없어 행정계통을 경유, 청와대에 보고가 올라왔다. 즉시 미대사를 불러 내용을 파악하는 과정에 미국은 한국정부가 3선 개헌을 하지 말고 후임자에게 권력을 이양했으면 하는 미국정부의 훈령을 전해듣고는 얼마간 말미를 주도록 요청했다.

즉시 박대통령은 관계자들을 불러 소맥분 대책회의를 했으며 쿠데타 이후 집권도중 때때로 미국의 압박을 느껴 어느 정도 반미, 친일 성분의 소유자가 된 박대통령은 대책회의 후 직접 일본의 미스비시 회장을 국제전화로 연결, 소맥분 수량 다과를 막론, 가능한 화급히 한국으로 수송해 줄 것을 요구했다.하늘이 도왔음인지 그 당시 미스비시 화물선박 중 캐나다에서 소맥분 5만톤을 싣고 일본 근해까지 오고 있는 화물선이 있어 행선지를 부산항으로 변경, 3일 후 입항한 소맥분을 예정대로 하역, 서울을 비롯 전국 각 지역으로 수송, 난관을 모면하면서 미국 요구를 묵살, 3선 개헌을
추진, 한미관계가 악화되어 간다.

이처럼 식량은 1차산업국가에서는 권력 유지와 직결되고 피를 말리듯 중요하고 긴급한 정책인데 북한으로 하여금 오로지 쌀문제만 신경을 쓰고 평화 정착(배부른)을 위한 여타 안건에는 관심이 없고 떼를 쓴다거나 회담 파행의 책임을 북에 있는 것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다면 몰라도 한참 모르는 사람들이다. 20차 남북 장관급 회담이나 남북경제협력추진위원회 회담에서 북한이 2.13일 합의 이행에 착수한 후 남한은 쌀 차관을 제공하겠다고만 했으면 책임공방에서 면할 수 있었을 것을 5월 말부터 쌀 차관 제공을 시작하겠다고 선심성 일정까지 추가했는지 모르겠다. 그러니 북한 대표는 5월말 약속을 지키라고 주장하는 것 아닌가.

이상에서 보듯 한국은 실리도 없고 명분도 없는 빌미를 주어 스스로 족쇄를 채우는 격이 되어버렸음을 안타깝게 생각한다. 향후 각종 남북관계 회담에 임하는 남한 대표들은 신중을 기했으면 하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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