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3년 모자랍니다

2007-06-11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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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병렬(교육가)

피천득 교수는 1910년 5월 29일 태어나서 2007년 5월 29일 대지의 품에 안기셨다. 97년간의 일생이었지만 아쉬움이 남는 것은 생존의 의미가 더 큰 영향력을 주기 때문이다. 스승으로, 문인으로 피교수처럼 사랑 받기도 쉬운 일이 아니다. 피교수야 말로 누군가의 말처럼 ‘보통 사람’으로 성공한 일생을 보내셨다.
이 모든 것은 그 분의 일상 생활과 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소탈하고 간소한 일상 생활은 말같이 쉬운 일이 아니지만 이것을 끝까지 실천하셨다. 또한 그 분의 수필은 ‘인생의 아름다움’ ‘인간 본연의 의지와 온정’에 관한 것이었다. 그 문체가 간결하고 독특한 리듬을 가지며 아름다운 서정적인 특색을 보인다. 따라서 피교수의 수필이 신변 잡기를 넘어선 수필의 예술성을 높혔다는 평을 받게 한다.

인간 관계에는 선배 후배, 또는 애인, 지인이나 친구 관계가 아닌 것도 있으며, 마치 물과 흡사한 사귐이 편안한 교류를 이룬다. 피교수와는 가족끼리 얼기 설기 이어진 인연으로 재미있는 에피소드들이 있다.첫번째 이야기. 이것은 오래된 이야기다. 따님 서영이 부산에서 피난 학교에 다닐 때 어느 날 감내 바닷가로 소풍을 갔었다. 그런데 도중에서 작은 비를 만났다. 학생들을 데리고 귀가하던 중 피교수가 한 손으로 우산을 받고 또 다른 우산 하나를 들고 마주 걸어 오셨다. 그러나 다른 학생들을 보고는 그 분도 우산을 접고 같이 비를 맞으며 일행을 따라 오셨다.


두번째 이야기. 그 분이 뉴욕에서 따님하고 같이 계실 때의 일이다. 그 날 따라 눈이 펑펑 쏟아졌다. ‘서영, 오늘 날씨 때문에…’ 필자가 전화로 말하자, 옆에서 피교수의 목소리가 들렸다. ‘데이트하는데 날씨가 무슨 관계가 있느냐’ 그래서 피교수와 함께 눈길을 걸었다. 길이 미끄러워서 그 분을 돕고 싶었지만 참았다. 모처럼의 어려운 행차로 본 영화는 신데렐라 만화였다니까 마치 소년 소녀 이야기라고 웃는 친구가 있었다.

또 다른 이야기도 있다. 피교수가 뉴 헤이븐에 머무실 때다. 그랜드 센트럴 기차역 광장에 있는 시계 앞에서 그 분을 만났다. 이 자리가 바로 슐라밋 이쉬 키쇼르 작 ‘사랑의 약속’에서 미지의 연인들이 처음 만나기로 했던 곳이다. 피교수는 만나자 마자 ‘오늘은 인상파 그림’을 보는 것이 목적이라고 하셨다.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에서 그림 감상을 끝내고 처음 자리에서 기차를 타고 가시기 전이었다. 바지 주머니에서 저서 ‘산호와 진주’를 꺼내 건네주셨다. 왜 그때서야 책을 주시는지. 피교수가 세상을 떠나셨으니까 이런 일들이 더욱 소중하게 느껴진다.

그 분의 따님 사랑은 온 천하가 알고 있다. 그러나 따님의 아버지 사랑은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그녀가 어렸을 때는 아버지가 구슬치기 친구였고, 가끔 어깨동무도 하였고, 대학에 입학하자 머리 모양, 옷 색깔, 구두 모양까지 아버지의 안색을 보고 선택하였다. 대학에서 전공과목 선택, 유학 가는 학교 선택까지 아버지와 깊이 상의하여 결정하였다. 이것은 아버지에게 선택권을 맡긴 것이 아니라 조금이라도 아버지를 기쁘게 해드리고 싶은 따님의 영민하고 섬세한 마음씨를 본다. 그녀가 바이얼린 전공인 아들의 한국내 독주회를 연 것도 음악을 사랑하는 아버지께 드리는 선물이었을 게다. 그러다가 하관식에서 국화 한 송이를 관 위에 놓고 오열한 심정을 알 것 같다.

길거나 짧거나 삶에는 끝맺음이 있어 더욱 아름답다. 그런데도 피교수가 이왕 97세까지 계셨으니 1세기를 채우시기를 은근히 바랐던 것은 그 분의 맑은 샘물같은, 한 줄기 빛같은 가르침이 그대로 이어지기를 바라는 염치 없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래서 부음을 듣고 ‘3년 모자랍니다’라는 욕심이 생겼던 것이다.피교수는 ‘작은 놀라움, 작은 웃음, 작은 기쁨 그리고 작고 연약한 아름다움’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셨다. 그리고 ‘훗날 내 글을 읽는 사람이 있어 사랑을 하고 갔구나 하고 한숨지어 주기를 바라기도 한다. 나는 참으로 염치없는 사람이다’라는 글을 남기셨다. 그리고 멀리 있는 한 명의 독자는 ‘3년, 모자랍니다’라고 염치없는 독백을 한다. 욕심은 커가기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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