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팬티바람으로 뛰기

2007-06-06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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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춘석(뉴욕그리스도의 교회 목사)

내가 이만수 야구선수를 만난 것은 1986년 11월 수원 중앙침례교회 새 성전 어린이 부흥회 때이다. 한참이나 인기있는 그는 간증자로, 나는 설교자로 어린이 앞에 섰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기억이 생생하다.큰아들의 이름이 하종이입니다. 하면서 하나님의 종이 되라고 지었다고 했다. 그리고 20년이 지난 후 그의 이야기를 멀리서 듣는다.

“인천문학구장이 만원이 되면 팬티만 입고 뛰겠다”며 침체된 한국 프로야구 중흥을 자임한 이만수 SK 와이번즈 수석코치의 발언은 그의 말처럼 “팬을 위해, 프로야구 발전을 위해 이쯤 못하겠느냐”며 “야구장은 나의 안방이나 마찬가지니 팬티차림은 오히려 당연한 것”이라며 재치있게 답했다 한다. 그리고 그는 그 약속을 이루기 위하여 팬티바람으로 그 큰 야구장을 돌았다. 변함없는 그의 모습에서 펜으로 자랑스럽다.


사람이 옷을 벗는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일 것이다. 선악과를 따먹은 뒤에, 인간은 그들이 벌거벗은 것을 알고 서로 부끄러워 했다. 그리고 옷을 입기 시작하면서 거짓 문화가 나타나고 옷을 골라 입으면서 품위를 내세워 형식을 배워 나갔다. 본회퍼는 ‘벌거벗음’을 분열되지 않은 상태의 본질, 타인 안에서 자신을 보고, 자신 안에서 타인을 보는 삶으로 해석하기도 했다. 아담 뿐만 아니라 노아도, 그리고 예수님 시대에 홑이불만 두르고 있다가 벗은 몸으로 달려간 사람에 이르기까지 벌거벗음에 대한 이야기는 성서 속에도 많다.

죄를 저지른 타락의 결과는 결국 열매를 따먹은 후 눈이 밝아져서 ‘벌거벗음’을 알고 알몸을 감추려고 하는데, 하나님 앞에서 결코 숨을 수 없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숨으려고 했다. 그 후 벌거벗음은 수치요, 불명예의 느낌을 불러 일으켰다. 수치라고 하는 것은 ‘날카로운 것으로 고통을 주다’ ‘예리한 것으로 찌르다’를 의미한다. 즉, 치명적인 약점, 결정적인 죄라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대의 수많은 사람들은 부끄러움을 모르고 벌거벗음을 통해 돈을 벌고 쾌락을 즐긴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을 통해 모든 사람을 구원에 이르게하는 용서와 사랑의 포용문화를 형성한다. 세속의 문화는 ‘벗기는 문화’이다. 다른 사람의 허물과 단점을 들추어내고 흠집을 내어 그 위에 타고 올라 내가 이겨야 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의 허물과 문제를 덮어주고 일어설 수 있도록 격려하는 것, 이는 바로 ‘사랑’이다.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이 땅에도 그런 에덴동산 같은 곳을 한군데 만들어 놓았다는 생각이 든다. 비록 죄 때문에 완전하지는 않지만 부부가 함께 하는 지리, 그곳은 분명 에댄동산이다.

부부 사이에는 내 연약함의 벌거벗음이 있고, 내 무능함의 벌거벗음이 있으며 내 약점의 노출이, 또 내 영혼의 깊은 상처의 드러남이 있다. 그럼에도 부부는 서로에게 그런 부족한 모습들을 보이면서도 자신의 벌거벗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랑하는 상대가 자신의 벌거벗음을 부둥켜 안아주고 이해해 주고 감싸줄 것을 믿기 때문이다. 그 믿음 때문에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이만수 코치가 팬티 차림으로 뛰어도 우리가 기뻐하는 이유는 그를 사랑하고 약속을 지킨 귀한 이유를 우리가 감싸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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