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6월에 읽는 백범 김구와 남북정상의 꿈

2007-06-06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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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환(목사)

6월이면 늘 우울한 마음이다. 금년은 연초부터 6.25는 ‘내전’이니 ‘동족상잔’이니 하는 설전이 오고 갔다. 언제부터인가 한국의 식자층들은 삐딱하게 대강 둘러대는 말을 예사로 한다. 동족상잔이란 말은 6.25를 비판하는 개념에서 나온 것이고, 내전이란 말은 책임 없는 개념에서 하는 말이라 하겠다.유례없이 잔인했던 6.25를 국군 통수권자가 객관적으로 대강 말하는 것이나 고위층들이 평양에 줄서서 들어가는 것을 보면 얼굴이 뜨겁다. 김일성의 전용열차를 한번 타보고 ‘역사적’이라고 말하는 것이나 백범의 뜻을 알지도 못하면서 감구지회(感舊之懷)하는 자태를 보고 백범일지와 선우진의 기록을 다시 읽으며 이 글을 쓴다.

1923년 6월 6일 내무총장 김구는 임시정부에 도전하는 ‘조선공화국’을 해체하라는 경고문을 발표한 일이 있다. 내용인 즉, 독립운동을 효율적으로 통일하기 위하여 국민대표회(국내외 70여 독립단체)가 상해에서 열렸을 때이다. 박은식이 임시 의장이 되었으나 공산주의자로 불신임 사
퇴했고, 다음으로는 안창호를 세웠으나 공산진영에서 친미주의자로 극렬하게 몰아 반대하여 사퇴했다.


끝으로 좌, 우파와 앙금 없이 무오 대한독립선언(2.8독립선언의 초석)과 신흥군관학교 설립의 주역으로 만주 대일전선을 이끌던 대한통의부장 김동삼을 회장으로 세웠다.좀 진정되는가 싶더니 공산계열간의 내부 분쟁(레닌으로부터 받은 공작금 관계)이 일어났다. 임시정부를 해체하라는 여운형의 ‘창조파’와 법을 수정하고 개혁하면 된다는 이동회의 ‘개조파’간의 격한 분쟁 끝에 여운형이 탈퇴하여 ‘조선공화국’을 수립 선언한 사건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초기부터 내우외환으로 순탄치 않은 지평을 보여주고 있다.

1935년 6월 20일 이후 좌, 우파가 다시 통합하여 대일전선에 대응하는 민족단체 대표회의가 남경에서 있을 때이다. 명칭을 ‘한국민족혁명당’이라고 할 것인가 ‘조선민족혁명당’이라고 할 것인가 하는 문제로 오래도록 고심하다 좌파 김원동과 김두봉의 의견대로 ‘한국’ ‘조선’이란 국가 명칭을 빼고 ‘민족혁명당’으로 결정했다. 이국땅에서 국적 없는 집단이 되었다.

오늘의 한반도기와 같이 어설픈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다. 김원봉(황포군관학교 4기생으로 이동휘의 비밀요원)은 예상대로 적색운동에 노출되어 퇴출당했다. 그는 즉시 조선민족혁명당을 조직했으나 한인애국단 윤봉길 사건 이후 백범이 없는 곳에는 중국정부와 해외동포들이 원조하지 않았다. 이에 대한 원한관계로 그의 사주를 받는 이운한은 임정 국무위원들에게 사격을 가하여 현익칠은 사망하고 이청천은 경상을 입었으며 백범과 유동열은 천행으로 병원에서 깨어났다. 14년 이후 1949년 6월 26일 다시 찾아온 흉탄은 백범의 순국으로 이어지고 이듬해 6월 25일에는 임정
초기의 좌,우파의 시련이 끝내 이데올로기전으로 동족상잔이 된 악한 결과를 가져왔다.

오늘의 한반도 정세에서 백범과 같이 혼신을 다하며 정직하게 조국을 사랑한 사람이 누구인가? 백범은 서대문 형무소에서 마당을 쓸고 유리창을 닦을 때나 인천 부두 건설에 동원되어 쇠사슬에 묶여 흙지게 사역으로 온 몸이 붓고 병들어 지탱하기 어려울 때도 늘 “하나님, 조국 한국을 위하여 이렇게 일할 수 있게 하여 주십시오”라고 기도했다는 고백을 안창호와 이시영에 했을 때 모두들 눈시울을 적시고 말을 잇지 못했다고 한다.
미국의 신학자 니버는 “인류의 역사가 존재하는 한 악은 영원히 존재한다”고 했는데, 오늘의 남북 정상들은 한반도라는 한 이불 속에서 어떤 꿈을 꾸고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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