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다 때려 치우고!

2007-05-11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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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춘기(골동품 복원가)

루터(1483~1546 독일)는 법학자요, 신부요, 종교개혁자이다. 가톨릭에 대한 95개 항의문을 비렌비르크 성당 정문 앞에 내다 붙임으로써 그의 종교개혁의 대장전의 막이 오른다.1520년 교황으로부터 내려진 파문장을 대중 앞에서 불살라 버리고 “만인사재’임을 천하에 선언하면서 불굴의 개혁 의지를 불태운다.

드디어 루터는 독일 시인으로서의 권리도 박탈당하고 국법의 보호권 밖으로 추방당하고 만다. 모든 기득권을 다 때려 치우고 나선 루터가 오늘에 살아 그의 시각에 비친 오늘의 한국 기독교는 어떤 양상으로 비쳐질까. 만족할까? 아니면 또 다른 개혁의 의지를 불태울까? 기독교 신자인 나는 궁금해 죽겠다.며칠 전, 밥시도 술시도 아닌 그런 시각, 식당은 한산했다. 나, 그리고 한 집 건너 자리에 남녀 세 명이 전부다.한인 유학생으로 보이는 이들은 토론에 열중하고 있다.


들리는 내용으로 보아 장래 진로 문제에서 심각한 인생 문제로까지 토론은 비약하고 있다. 기왕에 바람맞은 약속? 불쾌한 심정에 술잔을 기울이며 나는 열심히 학생들의 토론에 귀를 기울였다.이렇게 한참이던 토론이 일순에 뚝 그치고 무거운 적막 속에 빠져든다. 침묵 그리고 침묵, 드디어 땅이 꺼지는 소리 “다 때려 치우고 목사나 될까!” 한 학생의 소리, 차라리 비명이요 절규이다. 머리를 떨구고 자리에서 일어나 식당을 빠져나가는 학생들의 뒷모습을 보면서 나는 폭풍우 몰아치는 광야의 진달래를 연상한다.

“다 때려 치운다”는 말은 결코 생소한 말이 아니다. 일상생활에서도 종종 듣는 일종의 ‘빈 총’같은 수식어다. 1세들도 대다수가 “다 때려 치우고” 이민 보따리 싸들고 온 ‘역마살’들이다. 그런데 방금 떠난 학생들이 남긴 “다 때려 치우고 목사나 될까” 하는 말이 왜 이다지도 신경을 건드리고 지나갔을까.이 말이 술김에 토해낸 빈말인지, 아니면 한인학생 사회에서 ‘궁치통’으로 쓰여지고 있는 일상적인 말인지, 만일 이것이 나만 모르는 세속어로 널리 알려지고 있다면 슬프고 불행한 일이다. 세속을 떠난 신선한 성직(목사, 신부, 스님 등)이 인간을 한없이 피곤하게 만들고 미치게 몰아가는 경쟁사회를 벗어나 보다 쉽게 생활이 보장되고 명예를 얻고 출세의 길로 비춰졌다면 여기에 대한 답은 오직 성직자의 몫이다.

성직은 말 그대로 신선하고 신성한 직업이다. 그런 점에서 신으로부터 선택된 직업이라고도 한다. 속세의 고통을 떨쳐버리고 가는 길이 아니라 속세의 고통을 한몸에 짊어지고 가는 길이다. 성직자는 나를 믿고 따르라는 믿음의 대상이 아니다. 저 분(예수, 부처)을 믿고 따르라는 안내자이다. 때문에 존경의 대상자이다. 존경은 높은 인격에서 우러나온다. 인격 파탄자는 이미 존경의 대상이 아니다. 때문에 성직은 “다 때려 치우고” 가는 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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