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칼럼/ 비운 마음으로 살아갈 수만 있다면

2006-11-11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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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욱(목회학박사)

인간은 인간의 한계를 벗어날 수가 없다. 아무리 용틀임을 해도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이기에 그렇다. 인간의 종말은 죽음이다. 세계를 주름잡던 많은 영웅들. 돈으로 성을 쌓던 많은 부자들. 세계인의 사랑을 한 몸에 받던 수많은 예술가, 학술인, 과학자들. 모두 사라져 갔고 사
라질 것이다.

그러기에 죽음은 모든 인간에게 내려지는 평등한 선물일 수 있다. 부귀와 영화, 명예와 권력을 가진 사람은 수백 년 살고 가난하고 힘없고 평범한 사람은 일찍 죽는, 그런 것이 통하지 않는 게 죽음이다. 나이가 들면, 죽음은 누구에게나 찾아가는 손님이다. 죽음과 더불어 한 생명이 가졌던 부귀영화 권세와 명예가 그 이름과 함께 서서히 사라져 감을 볼 수 있다.
그러니 현재를 즐겁게 살아야 한다. 그런데, 현재를 즐겁게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 문제다. 그 방법 중 하나가 역설 같지만, 마음을 소유를 비워나가는 방법이라면 어떨까. 어차피 인간은 죽을 때 마음도, 소유도 그 무엇 하나 가지고 가지 못하고 남기고 가야 한다. 그러니 살아있을 때 죽을 준비로 마음과 소유를 점점 비워가는 방법이 현재를 즐겁게 살아가는 방법 중 하나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마음을 비운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마음을 비운다는 말은 욕심을 비운다, 즉 욕심을 줄인다는 말과 상통한다. 인간의 욕심은 밑도 끝도 없다. 죽어야 욕심이 끝이 난다. 이 욕심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살다간, 인간에게 똑 같이 부여된 심성이다. 아니, 지금 살아있는 인간들과 앞으로
태어날 인간들에게도 욕심은 그대로 유산처럼 전승될 것이다.
어쩌면 인간에게 주어진 욕심은 원죄에 가까울 수 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은 그 욕심 때문에 지금의 문명을 일으켜 만물의 영장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세상에 있는 수많은 동물과 생물 중 인간보다 더 욕심이 많은 존재는 없다. 인간의 욕심에게 먹혀들지 않는 동식물이 없기에 그렇다. 인간의 욕심은 이제 이 지구까지도 먹어 들어가고 있다. 환경파괴다.

소유를 비워나간다고 할 때 가장 생각나는 사람은 법정스님이다. 70이 넘은 그는 지금도 심부름하는 상좌 스님 하나 없이 산골 오두막 같은 산사에서 스스로 밥을 짓고 빨래를 하며 혼자 살아간다. 그는 가끔 글을 쓴다. 그가 쓰는 글들은 맑은 시냇물 소리 같다. 그의 생을 보면 누구보다 죽음을 잘 준비하며 살아가는 무소유의 인간이 아닌가 생각된다.
법정 스님같이 무소유의 나날을 살아 갈수는 없더라도 법정 스님 같은 비워진 마음과 무소유의 삶으로 살아가려고 노력은 해야 될 것 같다. 그것이 현재를, 즉 현생을 즐겁게 살아가는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가 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재산이 아무리 많은 들 무엇 하나. 형제와 가족끼
리의 재산싸움으로 단 하루 맘 편할 날이 없다면 차라리 무소유가 더 행복한 삶이 아니겠나.

그런데, 이미 소유된 것은 어떻게 하나. 인간이 인간을 소유할 수는 없다. 하지만 ‘함께 하는 것을 서로의 인격적인 소유’라고 가정한다면 가족끼리도 그 소유 개념 중의 하나가 될 수도 있다. 특히, 결혼을 하고 가정을 만들어 자식을 낳아 한 가족을 이루었을 때 따라오는 소유의
개념은 다시 되 돌이킬 수 없는 영원한 소유가 된다.
이런 상황에서는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무소유로 살아가게 되는 걸까. 받아들이는 것. 긍정하는 것. 어쩔 수 없는 것. 이미 저질러진 상황이다. 이럴 때는 서로가, 가족과 가정을 위해 열심히 살아가는 것과 가족 서로간의 인격적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고 존중해 줄 때, 그 삶이 무소유의
개념으로 살아가는 것이라 하면 어떨까.
소유 중 가장 큰 소유는 인간이 가진 목숨이다. 그렇다고 목숨을 비울 순 없다. 목숨을 비운다 함은 곧 죽음을 말하기 때문이다. 하늘이 목숨을 부르는 그 순간까지 목숨은 살아야 한다.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목숨만 연장되면 인간은 즐겁게 살 것 같은데 그렇지 않다. 욕심 때문이다. 욕심으로 인해 이것도 가져야 하고 저것도 있어야 한다.

인간이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려고 하는, 즉 죽음을 극복하려고 하는 것 중 하나엔 종교가 있다. 종교적 차원에서의 죽음 극복은 여러 가지가 있다. 죽은 후 다른 생으로 태어나는 것도 있고 죽은 후 다시 태어나 영원히 살아가는 것도 있다. 어디까지나 종교적 차원의 인간 한계의 극복
이다. 어쨌건, 인간은 죽는다.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선물처럼 주어지는 죽음 전, 생의 삶에서 가장 즐겁게 살아가는 방법 중 하나. 비움이다. 줄임이다. 욕심을 줄이고 마음을 비운 상태가 지상에서의 육신을 입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즐거운 상태 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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