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깻잎 이야기

2006-08-19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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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수(롱아일랜드)

아내가 선교여행을 떠난지 일주일이 지났다. 냉장고를 열고 비축된 반찬들의 줄어드는 현황을 살피다 서랍 칸에서 큰 비닐봉지에 가득 담겨있는 깻잎을 발견하게 되었다.아내가 여행 떠나기 전 날, 어느 분이 집에서 농사지은 것을 따서 준 것인데 아내가 미리 손 써놓지 못하고 그냥 넣어둔 것이었다. 봉지를 열어보니 아직 싱싱하기에 일단 씻어놓을 생각에 물을 틀었는데 어찌나 많은지 한 장 한 장 씻는데 반시간이 넘게 걸렸다.
그런데 씻으면서 아무리 연구를 해도 날 것으로 먹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이민생활 20년이 되어가며 웬만한 요리와 김치도 담굴 줄 알기에 가정에서 아내의 역할에 핀잔을 주기 일쑤였는데 깻잎에서 꽉 막혀버리고 만 것이다.그러면서 아내만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 하고 집안을 곰곰히 살펴보다 모든 걸 다 내가 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나는 큰 망상과 착각 속에 살고있는 빛 좋은 가장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아내가 있기에 내가 빛나 보였던 것을 모른 채, 나 혼자 자가발전해서 빛나는 것이라고 의기양
양했던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아내가 돌아오면 나의 교만함을 고백하고 그간의 무례함에 용서를 구해야지 결심하고 결국 다음날 아침 세 봉지에 나눠 담아 함께 일하는 분들에게 주었는데 너무들 좋아했다.


아내가 있었으면 두고 두고 맛있게 먹었을텐데 하는 아쉬움도 있었지만 한 분의 손에서 전해진 깻잎이 벌써 네 가정을 흐뭇하게 하는구나 하는 생각에 하루를 흐뭇하게 보낸 후 저녁에 어느 모임에 참석하게 되었다. 그 중에 한 분이 오늘 식사는 잘 챙겨 드시냐며 작은 가방 하나를 건네주었다. 집에 돌아와 가방을 열어보니 ‘세상에 이럴 수가!’ 아침에 나간 생 깻잎이 맛있게 조리되어 저녁에 다시 들어오다니...

깻잎을 주고 받는 분들의 얼굴을 떠올려 보았다. 모두들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는 듯하다. 깻잎이 이렇게 고맙게 느껴질 줄이야...
우리가 갖고 있는 것, 작은 것 하나라도 움켜쥐고 있기 보다 펴서 나누어질 때 우리의 마음은 좀 더 여유로워지고 풍요로워지며 세상은 평화 속으로 조용히 한 발짝 다가서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깻잎아! 고맙다. 더욱 더 싱싱하게 자라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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