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칼럼/ 은퇴 후 어디서 살아야 하나

2006-08-11 (금)
크게 작게
이기영(주필)

한인들의 이민 초창기에는 지금처럼 한인들이 많지 않았고 미국 생활이 물 설고 낯선 생활이었다. 그래서 미국에 살면서도 마음은 한국에 가 있었다. 특히 노인들은 말이 통하지 않으니 마음대로 다닐 수도 없고 젊은이들이 모두 일을 나가고 나면 외롭기 그지없는 감옥생활 같은 하루 하루를 보냈다. 그래서 언제나 한국에 돌아가는 것이 꿈이었는데 그렇게도 그리워한 한국에 돌아가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후 유골이 되어 한국의 선산에 묻히는 경우도 있었다.

사람은 평생을 사는 동안 한 곳에서 살기가 어렵다. 유학이나 직업이나 사업을 좇아 타향이나 타국생활을 하는 수가 많다. 특히 격동기를 거치면서 살아온 한국사람들은 본의 아니게 타향살이를 한 경우가 많다. 어떤 이는 일제 때 만주로 갔다가 해방후 북한에 돌아왔으나 다시 월남하여 한국에 살다가 남미 이민을 거쳐 미국에 왔는데 그가 산 곳마다 가정과 사업을 이루었다고 하니 참으로 인생유전이 아닐 수 없다.
대체로 사람이 사는 곳을 가장 많이 옮기는 때가 젊은 시절과 은퇴할 때인 것 같다. 젊었을 때는 청운의 뜻을 품고 공부나 취업이나 사업을 위해 다른 곳을 찾는다. 나이를 먹어 은퇴를 하게 되면 직장이나 사업에는 더 이상 얽매이지 않기 때문에 노후를 편안하게 살 수 있는 곳으로 옮겨간다. 미국인들은 은퇴 후 대체로 기후가 좋은 플로리다나 애리조나 등을 택하는 경우가 많고 더러는 생활비가 적게 드는 멕시코 등지로 이주하기도 한다.


그런데 최근 한국에서도 은퇴 후 다른 나라로 이주하는 바람이 불고 있다고 한다. 한국인들은 타향살이를 싫어하고 타향에 살더라도 늙으면 고향에 돌아가려는 귀소의식이 강한 사람들인 줄로만 알았는데 그렇지만도 아닌 것 같다. 은퇴지로 각광받는 곳은 동남아와 필리핀, 남태평양의 작은 섬나라들이다. 이런 곳은 자연환경이 좋을 뿐 아니라 한국에서 드는 생활비의 몇 분의 1만 들여도 상류생활을 할 수 있기 때문에 노후를 위한 경제적 준비가 충분하지 않아 한국에서 살기 어려운 사람들에게 인기라는 것이다.
옛부터 경로사상이 미풍양속으로 이어져 내려온 한국은 노인들의 천국이었다. 그런데 조기 은퇴가 정착하면서 나이 많은 사람들은 가정과 사회에서 힘을 잃고 뒷전으로 밀려났다. 한국의 노인들은 백화점이나 식당, 심지어 길거리에서도 보이지 않고 모든 곳을 젊은이들에게 점령 당했다. 노인들은 파고다 공원에나 가야 볼 수 있을 정도로 찬밥 신세가 되었다. 이런 현상은 사회적으로 나타나 이제는 각계에 원로라는 것이 없다. 여당의 대표가 60세 이상 노인은 투표를 하지 말고 집에서 편안히 쉬라고 한 것이나 국방장관이 군 선배들을 오래 전에 군생활을 해서 요즘 실상을 잘 모른다고 한 것이 모두 노인을 하찮게 보는데서 나온 말이다.

노인의 천국이 아니라 이렇게 노인의 지옥이 되었다. 은퇴 후 노후생활을 편안히 할 곳으로 떠나는 추세가 나타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 한국인들이 해외로 은퇴하는 형태에는 두 가지 타입이 있다. 한국보다 노후 생활비가 적게 드는 곳을 찾는 사람들은 동남아와 필리핀 등지를 선호한다. 그러나 자녀들이 미국에서 공부하여 미국에 정착한 경우, 부모들이 노후에 미국에 와서 자녀들과 함께 사는 경우가 많다. 이런 사람들 가운데는 고위관리, 저명인사, 사업가 등 출신으로 부유층에 속하는 사람들이 많다. 최근 한국의 외환 자유화와 부동산투자 자유화 이후 한국의 자금이 미국에 몰리고 있는 것이 이런 추세를 반영하고 있다. 말하자면 한국의 해외 은퇴지로 부유층은 미국을 선호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젊은 시절부터 미국에 이민와서 살고 있는 우리 한인들은 이민 오기를 참 잘했다는 말이 된다. 과거에는 고국을 그리워했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우리는 돈 많은 한국의 은퇴자들이 살고 싶어하는 미국에 살고 있으니 은퇴 후 다른 곳으로 갈 필요도 없게 되었다. 미국에서는 한국 보다 월등히 나은 의료혜택을 받을 수 있고 소셜시큐리티 혜택을 받을 수 있고 그런 혜택을 못 받는 사람은 웰페어를 받을 수 있으니 ‘미국이 효자’라는 말이 틀린 말이 아니다. 다만 한인들이 사는 곳마다 LA나 뉴욕처럼 서울의 어느 동네에 못지않은 한인타운이 있으면 생활을 더욱 편리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젊었을 때 열심히 일하여 미국 기준
으로 여유있는 노후생활을 할 수 있을만큼 돈을 저축해 놓는다면 미국이야말로 최상의 은퇴지가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