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칼럼/아침 출근할 때마다 만나는 한 사람

2006-08-05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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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욱(목회학박사)

아침 출근할 때 마다 만나는 한 사람이 있다. 머리가 다 벗겨진 백인 할아버지다. 그는 집이 없다. 아니 집이 있는데도 집을 놔두고 나왔는지도 모른다. 전철 아래 시멘트 기둥모서리가 그의 거처다. 그의 거처는 벽도 없다. 방도 없다. 전등도 없다. 창문도 없다. 그가 누워서 잠자는 곳,
바로 그곳이 그의 집인 셈이다. 하루는 그가 열심히 무엇인가를 보며 자신의 털을 뽑고 있었다. 왼 손에 들고 보는 것은 작은 거울이었다. 그리고 족집게로 털을 뽑는데 턱에 난 털이었다. 화장실에 갈 수 없어 면도를 못하니 거추장스럽게 난 턱수염 털을 그렇게 모두 뽑아 버리는 모양이었다. 가까이 가서는 볼 수 없었지만 그의 턱엔 수염이 별로 없이 반지르르 하게 보였다.

또 하루는, 그가 전철 아래 쓰레기통에서 무언가를 찾는 것을 보았다. 누군가가 버린 듯한 비닐봉지에 담긴 속 내용을 찾고 있었다. 불행히도 그 속 내용은 전부 비어 있었다. 아마도 먹을 것을 찾았나 보다. 그의 얼굴은 그래도 무표정이다. 그래도 또 그는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열심히 찾고 있다. 그런 그의 모습을 뒤로하며 나는 그 자리를 떠야만 했다. 그가 써니사이드 46가 전철 아래에 그만의 공간을 마련하고 혼자만의 동거를 시작한 건 불과 한 달도 채 안 되었다. 그동안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았는지, 혹은 가출한지 얼마나 되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나이는 약 60에서 65세 사이라 할까. 벗겨진 머리에 난, 몇 안 되는 머리칼은 하얗게 쉬어 백발이었다.


전철을 이용하는 승객들을 보호하기 위해 나와 있는 경찰들이 그를 많이 보았을텐데 그냥 내버려 둔다. 집 없는 사람들을 수용하는 시 운영의 셸터라도 데려가 주었으면 좋겠는데 그냥 내버려 둔다. 아니, 경찰이 그를 데려가려 했는데 그가 거절했는지도 모른다. 셸터에 데려가 보아야 몇 날 못 살고 또 나와야 할 그런 상황이 그를 그 자리에 있게 하는지도 모른다. 그에게도 분명히 가족이 있을 텐데. 왜 저렇게 나와, 집 없는 사람으로 살아갈까. 수많은 사람들이 아침저녁으로 그를 보지만 그에게 얼마나 관심을 가질까. 각자 먹고살기에 바빠 허둥대며 출근하거나 퇴근하는 전철 아래. 그는 그 누구에게도 동전 한 닢 달라고 손을 내밀지 않는다.
그는 그를 지나치는 사람들에겐 관심이 없듯 그저 그런, 평안한 얼굴이다. 그가 걸친 의복은 언제 갈아입었는지 모르게 때가 많이 타 있다. 목욕도 제대로 못할 것이니 몸은 얼마나 가려울 건가. 모르긴 몰라도 그의 옷과 몸 안엔 이가 많이 살고 있을 게다. 쓰레기통에 버려진 먹다 남은 음식 찌꺼기들을 먹으며 살아가니 얼마나 더러운가. 턱수염 털이야 족집게로 뽑는다 해도 그의 몸에 찌든 때들은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

그의 육신은 이렇듯 보통 사람들이 생각할 수 없는 그런 고난을 겪고 있을 게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평안하다. 왜 그럴까. 그의 영혼만은 그 누구도 갖지 못할 평안함을 맛볼 수 있기에 그럴까. 무소유로 살아가는 삶이기에 그럴까. 그는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 같다. 그는 남들이 먹다 버린 음식으로라도 배만 채운다면,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어 보이는 것 같다. 하루는 그의 잠자는 모습을 보았다. 아무것도 덮지 않고 맨바닥에 다리를 꼬고 잠자는 그의 모습. 무엇을 어떻게 먹었는지 모르지만 불쑥 나온 그의 배를, 그는 끌어안고 잠을 자고 있었다. 그의 잠자는 모습은 한 사람의 거지가 아닌, 성자를 보는 듯했다. 단 하루를 살기 위해 사는 듯
한 그의 삶의 상황 속에서 이런 아이러니 생각이 나올 수 있다니.

욕심으로 가득 채워진 이 세상. 시기와 질투가 넘쳐나는 이 세상. 모함과 사기와 분노로 까맣게 칠해진 이 세상. 돈만 있으면 태어나는 것과 죽는 것 빼고는 무엇이든지 다 할 수도 있는 황금만능주의 세상. 권력과 힘 앞에서는 언제나 허리를 굽혀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이 세상. 전쟁과
테러로 죄 없는 민간인들이 희생되어져야만 하는 이 세상. 악이 넘쳐나는 이 세상.
이런 세상에서 그는 아무 생각도 없는 듯, 배만 부르면 잠을 잔다. 그를 버린 자식이나 가족이나, 그 누구도 원망하지를 않는 듯 잠을 잔다. 그의 평안한 모습 안에서 나는 나의 끝없는 욕심과 욕망을 본다. 나의 질투와 나의 허상을 본다. 그래도 나는 그를 직시할 때마다, 그를 측은해 한다. 세상이 모순이 아니라 나 자신이 내 안에 모순을 품고 살아간다. 전철 아래 하얀 할아버지. 그는 집 없이 그 곳에 살지만, 나의 반면 스승이다. 그를 통해 나는 나 자신의 쓸데없는 욕망을 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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