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8월 14일과 15일

2006-08-07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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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병렬(교육가)

어제와 오늘은 하루 사이이다. 그러나 나라의 풍경이 180도 바뀌었다. 이제까지의 전쟁 색채는 보이지 않는다. 어디에 숨겼던 한복이고 태극기일까. 제각기 한국말로 떠들어댄다. 그러다가 미친듯이 만세를 부른다. 그 자랑스럽게 활보하던 일본인이 간혹 보이지만 초라한 모습으로 길가
로 걸어간다. 조심스럽게. 이와같이 꿈같은 상황이 벌어진 까닭이 있다.
그 날 정오에 일본 왕이 종전을 선언했기 때문이다. 바로 1945년 8월 15일의 일이다. 우리는 일본의 식민지에서 벗어난 것이다.

식민지에서 벗어났다는 것은 하나의 국가로 새로 태어난다는 뜻이다. 36년 동안 우리 나라에서 주인 노릇을 하던 일본이 전쟁에 져서 한국이 풀려난 것이다.식민지 생활이란 어떠하였나. 그들은 여러가지로 주인 행세를 하였고, 소위 달걀 노른자를 빼앗았지만, 가장 혹독한 일은 이름과 한국말을 빼앗은 일이다. 창씨 개명이라고 하여서 성과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꾸도록 강요하였고, 생활용어는 일본말을 쓰도록 하였다. 일제시대에 태어나서 10여년의 학교생활을 한 필자는 학교에서 한국어(조선어)를 배운 기억이 없다.


중학교에 입학하여 첫 일본어 시간이었다. 교사는 심각한 표정으로 바벨탑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하늘나라에 가려고 탑을 높이 쌓아올리던 오만한 사람들을 견제하기 위하여 하느님이 탑 위와 아래서 일하는 사람들의 언어를 다르게 하였다. 언어가 통하지 않게 되자, 사람들은 부득
이 탑 쌓기를 단념하였다는 이야기였다. 고도로 상징적인 예이다.
그 교사는 일본어 상용을 권장하려고 들려준 이야기였다. 하여튼 그 시절에는 일본말이어야 일을 볼 수 있었다. 그것 뿐이 아니고 징병·징용·정신대 등으로 남자 여자를 싸움터로 몰고 갔다. 지금까지 문제가 되고 있는 미해결의 장이 이렇게 발생하였다.

이 지역 어떤 학교에서 어린이들에게 이야기를 하였을 때 ‘그럼 지금 우리들이 영어로 말하는 것과 같았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아주 다른 이야기다. 그 때는 다른 사람의 강요에 따라서 일본말을 써야 했고, 여기서는 생활의 도구로서 영어를 쓰는 것이다’라고 설명하였다. 이름에
대해서도 영어이름은 사회생활의 도구이고, 정체성 확립을 위해서는 한국이름도 가지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말하였다. 학생들이 헷갈리는 모양이었다.

예일대학교 법과대학장이 나는 과연 몇 %의 한국인이고, 몇 %의 미국인인가 하고 고민하다가 ‘100%의 한국계 미국인’이라는 결론을 얻었다는 대목을 주의깊게 읽었다. 정직한 고백이고 현명한 결론이라고 본다. 그는 분명히 한국명도 가지고 있다. 일제시대의 나 자신도 심각한 회의에 빠졌었다.그런데 성장과정에 받은 교육은 무서운 것이라고 본다. 가끔 소스라치게 놀라는 일이 있다. 8.15 이후 결코 안 쓰겠다던 일본말이 튀어나오거나, 일본 교사가 하던 말이 떠오르는 것이다. 나라를 송두리째 빼앗은 그들이지만, 교실에서 만난 교사들은 훌륭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에겐 왜 고민이 없었겠나. 다른 나라를 빼앗었다는.

미국사람이 어쩌다가 너희 나라가 한 때 일본의 식민지였었는데, 그 때의 상황을 알고 싶다고 한다. 때로는 일본 친구가 같은 말을 할 때는 마음이 편하지 않다. 일본 친구에게 당시를 설명할 때는 그가 도리어 가엾어진다. 다른 나라를 점령하였던 조상들이 얼마나 부끄러울까 하고.

먼 역사는 읽을거리가 되지만, 직접 체험한 역사는 마음에 각인이 된다. 매년 이 때가 되면 한국의 근대사가 되살아난다. 그러나 이런 체험을 한 세대가 점점 줄어든다. 나머지 사람들은 책으로 읽거나 이야기를 듣게 되는데 지나지 않는다. 역사는 과거이면서 현재 살아서 움직인다. 한국내 사정이 어수선할 때는 이곳 생활 역시 편하지 않다.우리는 8.15를 기억에서 지울 수 없다. 위정자들이 저지른 일이지만 당시의 국민에게 전연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 누구의 책임을 따지기 전에 모두 합심해서 한국을 지켜야 한다. 우리의 물줄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한 곳이 바로 그곳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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