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칼럼/ 민심은 천심

2006-08-04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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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영(주필)

고대 민주정치의 표본인 그리스의 아테네에서는 모든 성년의 시민이 모이는 민회에서 모든 정치가 이루어진 직접민주정치가 행해졌다. 민회에서는 법안을 만들고 전쟁과 평화 등 외교정책을 결정하고 주요 관직을 선출했다. 그리고 도편추방법이라는 것이 있어서 민의를 어기고 독재를 하는 지배자를 민회의 결정으로 10년간 국외로 추방하기도 했다. 말하자면 여론재판인 셈이다.

아테네처럼 민주정치는 하지 않았던 나라에서도 민의는 항상 통치자들의 권력에 정통성을 부여하는 근거가 되었다. 로마에는 “백성의 소리는 신의 소리”라는 속담이 있는데 동양에도 “민심은 천심”이라고 하는 똑같은 금언이 있다. 그래서 중국이나 한국등의 왕조시대에도 국왕을 비롯한 지배층은 민심의 동향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고 민심을 얻는데 힘을 쏟았다.더우기 근대 민주주의시대에 와서는 민심이 절대적인 힘을 발휘하고 있다. 그리스에서 시작된 민주주의란 단어, 데모크라시는 민중이라는 「데모스」와 지배라는 「크라시」의 합성어이다.


즉 민중의 지배라는 뜻이다. 민중이 지배하는 민주주의에서는 민심 그 자체가 힘일 뿐 아니라 민심을 초월하는 어떤 힘도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사실 민심이라는 것은 어떤 사회의 다수 의견일 뿐 반드시 옳은 의견이라고 할 수는 없다. 민심은 어느 시점에 형성되는 세론이므로 옳고 그르다는 가치판단을 떠나 다수가 공유하는 생각일 뿐이다. 그러므로 소수 의견이 더 우수한 경우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이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 수많은 의견 중에 하나의 의견을 대표적 의견으로 내세우자면 어떤 방법이 있겠는가. 옳던 그르던 다수 의견을 따르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민주주의에서는 결국 다수 의견이 옳은 의견이 되는 것이다.

말썽 많은 한국의 교육부총리가 여론의 압력으로 밀려날 처지가 되자 청와대가 여론을 공격하고 나섰다. 자질이고 능력이고 따지지 않고 측근이면 된다는 코드 인사에 대해 야당과 언론 뿐 아니라 시민단체와 여당까지 비판하고 나서는 바람에 사면초가가 되자 어쩔 수 없이 사퇴 방향으로 가닥을 잡아가고 있는 마당에 청와대 비서실장이라는 사람이 여론을 질타했다. 대통령의 인사권이 여론재판으로 제동이 걸리는 행태는 고쳐져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현 정부의 집권자들의 여론이나 민의에 대한 적대시는 이번 뿐 아니라 걸핏하면 보이는 태도이다. 지난번 5.31 지방선거에서 여당이 완패를 했을 때 노무현대통령은 선거에서 나타난 민심과는 관계 없이 나의 길을 갈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국민을 개혁에 저항하는 세력으로 몰아부쳤다.

그 뿐이 아니라 현 정부는 출범 이후 줄곧 민의와 여론을 대변하는 언론에 대해 적대적인 정책과 자세로 일관해 오고 있다.이처럼 민의와 여론을 적대시하는 정부와 집권자를 과연 어떤 정부와 집권자라고 보아야 할까.
민주주의의 본질에서 보면 분명히 민주정부, 민주집권자가 아닌데 민주선거로 집권한 정부이고 사람들이므로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도 없으니 참으로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만약 노무현대통령이 민주선거, 즉 민의에 의해서 당선되지 않았더라면 누가 그를 대통령이라고 하겠는가. 인간적인 측면으로나 정치인의 자질로 볼 때 노무현 보다 훨씬 나은 사람이 대한민국에는 부지수로 많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유독 노무현이 대통령인 것은 선거 당시 어떤 바람이 불었건 노무현을 당선시킨 여론이 민의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런 노대통령이 민심을 코웃음치고 자기가 잘난 것으로만 생각하는 오만에 빠져있다면 그를 대통령으로 인정하지 않는 논리에 대해 항변할 수 없을 것이다.
대통령의 인사권은 국정 수행을 위해 중요한 권한이다. 그러나 대통령이나 그 무엇보다도 민의와 여론은 강력하다.

만약 민의에 의해 당선된 대통령이라도 민의를 무시하고 역행한다면 민의에 의해 자리에서 끌려 내려올 수도 있다. 하물며 자질 없는 교육부장관의 인사에 감히 여론재판 운운하면서 민의와 여론을 폄하한단 말인가. 민주주의에서 민의에 도전하는 자는 풍차에 달려드는 동키호테처럼 어처구니 없는 자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민심은 천심」이라는 말을 마음 깊이 새겨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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