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자연 본능

2006-07-25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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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춘기(골동품 복원가)

토요일 오후, 맨하탄 라커펠러센터 앞 거리 휴식공간 벤치에 앉아 나의 신경은 방금 책방에서 있었던 일로 가득하다.바로 길 건너에 있는 일본 책방 ‘기노구니야’에 들렸을 때 마치 천체 망원경으로라도 확대되
듯이 한 권의 책 표제가 눈동자를 파고 든다. <북조선 수용서에 인육이! 탈북자 증언!> 그대로 얼어붙고 만 나의 육신은 분노로 치를 떨었다. 이따위 가증스러운 표제를 달아놓고 그 이면에서 한민족에 대한 혐오감과 일본민족의 우월성이라는 반대급부를 노리려는 일본 작가의 악랄함에 숨이 막힌다.

탈북에서 탈남, 그리고 미국 망명으로 이어지는 탈북자들의 오늘의 실상이 그들 일본인이 말하는 ‘혼내(마음속에 감춰진 진짜 근성)’를 드러내게 한 빌미를 주었는 지도 모른다.가운데 통로 건너편 벤치에 오십대의 백인남자가 앉는다. 탱크 포신같은 카메라를 목에 걸친 차림이 이라크 전선을 헤매다가 방금 돌아온 사진기자를 연상케 한다. 순간의 걸작을 낚아채기 위해 온몸을 던지는 지하드적 예술가! 이 자가 무슨 냄새를 맡았을까 기대해 본다.저만치서 비키니에 가까운 핫팬츠 스타일의 두 여인이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다. 다이어트 흔적이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천부의 팔등신이다.


나는 한번의 눈길을 보내고 그대로 기자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기자는 벌써 땅바닥에 주저앉아 렌즈를 들이대고 있었다.기자의 태도에 압도된 나는 다시 시선을 여인쪽으로 돌렸다. 두 여인 가운데 오른쪽 아가씨는
이십대 초반, 키 170cm 정도에 금발, 넘쳐흐르는 가슴, 허리, 허벅지, 무릎, 그리고 십인치 아래는 의족이다. 여인의 의족은 본래의 다리 모양같이 위장해 만든 것이 아니라 엄지 두께 만한 은색 기둥에 운동화를 신은 골격의 족이다.아! 얼마나 완벽한 걸음걸이인가! 핫팬츠 청바지 의족은 완벽한 패션모델을 연출하고 있는 것이다. 저 경지에 이를 때까지는 그야말로 피나는 재활 훈련을 했을 것이다. 저 걸음에 반바지 아닌 긴 바지를 입었더라면 아아 ‘신’도 의족을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너무나 당당하게, 그러면서도 하늘과 땅이 통곡할 것만 같은 저 처절한 ‘핫팬츠 의족’의 뒷모습이 서서히 시야에서 사라져 간다.

기자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몹씨 심통한 인상이다. 그 뿐이 아니다. 어떤 죄책감에 사로잡혀 몹씨 괴로워하는 표정이다. 그런 기자의 행동이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토록 신나게 셔터를 눌러대고도 부족했단 말인가? 기자는 아무렇게나 카메라를 둘러메고 자리를 뜬다. 그런 기자를 지켜보면서 어떤 사건을 연상한다.

몇 년 전 사진기자 채빈카터는 수단의 기아 참상을 취재하는 과정에서 어떤 참상을 카메라에 담는다. 배고픔에 지친 한 소년이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고 머리가 땅에 닿도록 앞으로 수그리고 엎드려 죽어간다. 그 옆에는 독수리가 앉아 있다. 한 마리, 두 마리 시간이 흐를수록 독수리는 불어나겠지. 그리고 어떤 일이 벌어질까! 여기에 카메라 렌즈의 초점을 맞춘 사진기자! 그도 독수리 향연에 동참한 것이다. 이 사진으로 채빈 카터는 퓨리처상을 수상한다. 그 후 기자는 이 사진으로 인해 극심한 윤리적 갈등을 겪고있다는 신문기사를 읽었다. 방금 여기를 떠난 무명의 사진기자가 느꼈던 죄책감도 이와 유사한 고민이 아닌가 생각한다.

외출할 때만이라도 긴 바지를 입었더라면 완벽하게, 더 아름답게 정상인으로 처신할 수 있고, 사랑을 받을 수 있을텐데 이를 거부하고 핫팬츠 의족 그대로를 고집한 팔등신미녀! 이런 돌출적인 행동을 흔히들 자신에 대한 학대 아니면 보복, 또는 더 거창하게 비약시켜 사회에 대한 저주, 도전으로 해석할지도 모른다. 그럴지도 모른다. 그것이 사회의 보편적 발상이니까. 그러나 나는 보다 솔직하고 싶다. ‘핫팬츠 의족’에서 어떤 허식이나 가식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바로 본능, 그것에 충실했을 뿐이다. 더불어 노출하고 싶은 간절한 소망, 이것은 여성이 가지는 자연의 본능이요, 우주적 본능이요,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노출 본능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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